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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아이티 반정부 시위 원인과 해법

중남미 기타 이태혁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HK연구교수 2019/08/30

2019년 2월 7일은 축제의 날이어야 했다. 조브넬 모이즈(Jovenel Moise) 현 대통령의 취임 2주년 행사 당일이며 동시에 1986년(33년 전) 이 날은 무엇보다도 두발리에 (Duvalier) 장기 독재정권이 몰락한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티 수도 포르토 프랭스를 위시해 대다수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위 결과 유엔 아이티 정의임무단(MINUJUSTH) 2명을 포함해 40명이 사망하고 수 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아이티 현지 인권단체, RNDDH). 더욱이 78명의 죄수들이 반정부 시위 혼란을 틈타 탈옥하는 사건도 이어졌다.

 

현재는 다소 진정 국면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아직도 아이티 도심 등 곳곳에서는 소요가 발생하고 있다.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아이티 전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에너지 위기와 연동된 경제적 불편함과 이와 결부된 부정부패가 아이티 국민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하지만 작년에도 또 수 년 전에도 아니 아이티가 독립한 1804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정치 경제적 소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1)

 

본 글은 먼저 2017년 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문제점을 진단한다. 그리고 앞서 잠시 언급한 바대로, 반정부 시위가 작금의 정부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지난 1804년부터 끝없이 반복되었다. 되풀이되는 역사의 원인을 간략히 되짚어 보고 구조적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불안정한 시작, 불안정성의 가속화
‘얼굴 패권’으로 유명한 모이즈 대통령은 2017년 2월 7일 정부 수반으로 등극했다. 한 정상의 인기 정도와 상반되게 아이티의 경제는 전 세계 최하위권이다. 현 대통령이 정권을 창출할 시기 아이티의 경제는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90개국 가운데 142위를 기록했다.2) 더욱이, 전기수급과 관련한 「Spectator index」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티는 2017년 기준 전 세계에서 후미에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내전 중인 예멘 그리고 나이지리아 다음으로 전 세계 전기 수급이 최하위 국가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피폐한 현실 속에서 모이즈 당시 대권 후보자는 "24/24"라는 신정부 에너지 대표 정책(flagship policy) 공약을 전면에 내걸며 정권을 창출했다.

 

신정부의 대표적인 에너지 정책인 "24/24"는  모이즈 정부 출범 2년(24개월) 이내에 전국민에 매일(24시간)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비전이자 송배전 인프라 건설사업 프로젝트이다. 더욱이, 모이즈 신정부는 출범 100일째 되는 날 'Caravan of Change' 이니셔티브를 공포하며 아이티의 고질적인 문제인 식량안보 위기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동 계획은 모이즈 대통령의 5년간의 임기 동안 아이티 10개 주 전체를 방문하며 현장 실사를 통해 아이티 시민들의 필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정책적 결정을 진행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보건정책, 교육 및 환경 등과 아울러, 농업 등과 관계된 실태 조사가 병행된다. 특히, 식량안보와 관련하여 관개망 개선 및 상하수도 개선 사업으로 농업과 식품 안전의 향상 그리고 식량자급률을 확대하고자 함이다.3) 이와 같은 청사진을 품고 있는 ‘Caravan of Change’ 이니셔티브의 성공 여부는 안정적인 전기 공급에 달려 있다.

 

하지만, 온전한 전기 공급은 고사하고 에너지 부문의 부정부패가 현 정부와 유착되었음이 드러난 보고서가 의회를 통해 확인되었다. 현 정부 집권 이후 15% 이상의 인플레이션 등 경제위기가 더해지며 아이티 정국의 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반 정부 시위가 매 분기별로 발생하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2월 7일 발 대규모 시위는 일주일이 지난 후 다소 진정 국면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흡사 화마가 휩쓸고 간 것과 같이 깊이 파인 상처는 지금도 아이티 사회와 국민들에게 선명히 남아 있다. 시위 과정 가운데 돌출된 폭력성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아이티 국민들의 몸부림이었다. 현 정부가 들어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불평등과 굶주림이 성난 아이티 국민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특히 유류 가격 인상안으로 촉발된 현 정부와 국민 간의 대립각이 현 정부의 퇴진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이와 같은 폭력으로 점철된 대규모 시위는 26명의 사망자와 77명의 부상자를 양산하기에 이르렀다.4)
 
모이즈 대통령은 지난 2월 14일 대국민 발표를 통해 대국민 화합을 주장했다. 특히 대통령은 “자신의 나라에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싸울 것”이라는 입장을 전하며, 빈곤구제와 부패척결을 위해 힘쓸 것을 약속했다.5) 하지만 약탈의 피해를 본 한 생선가게 주인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피해자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현 정부를 비판했다.

“현 상황의 원인은 모이즈 대통령이며 약탈자들은 배가 고픈 것이다. 누군가 나라를 위해 일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Listin Diario, 현지 언론)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필자가 대규모 시위 발생 시 아이티의 옆 나라 도미니카공화국에 잠시 연구차 방문하며 현지인과의 인터뷰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항상 (정치,경제적 소요와 불편) 그래 왔으니까. 똑같을 것이다.” (현지 인터뷰, 2019년 2월 15일)

 

그렇다면 왜 이러한 정치, 경제적 불안정성이 지속되는가? 왜 국민은 있는데 국가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개입과 수탈로 점철된 아이티 역사
프랑스, 아이티 탈식민지화에 반쪽만 허용 그리고 빚의 굴레
“19세기 초에 비로소 진정한 민족해방전쟁이 생도맹그6)에서 시작되었다. 1794년 마침내 프랑스 공화국과 동맹함으로써해방을 쟁취했고, 이후 1804년 프랑스 군대를 격퇴함으로써 해방이 보전되었다.”7). 이렇게 아이티8)는 아메리카에서 흑인이 주도한 세계 최초의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오랫동안 외세로부터 간접적 지배를 받았다. 독립 선언 이후 일명 ‘근대화 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프랑스는 아이티에게 1825년 1억 5,000만 프랑(현재 약 210억 달러)을 청구했다. 비록 1893년 양국 간 협의로 배상금을 최종 9,000만 프랑으로 확정 지었지만 아이티가 이자까지 포함해 프랑스에 온전히 지불한 연도는 배상금을 청구한지 123년이 지난 1947년이었다.

 

프랑스의 강압에 의한 ‘근대화 배상금’은 독립국 아이티 공화국 출범이 반쪽짜리 성공으로만 머물 수밖에 없게 했다. 더욱이 이 배상금은 아이티의 빈곤 탈출 시도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게 한 기제였다. 이러한 경제적 압박은 심지어 흑인에 의한 흑인 노예제 부활이라는 사회적 병폐현상을 양산했다. 아울러, 배상금을 갚기 위한다는 취지로 인접국인 도미니카공화국을 침략하며 10여 년간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9)

 

미국, 아이티에 “스텝 인 (step-in)”
1843년부터 미국의 아이티 침공 이전인 1915년까지 22명의 대통령이 재임했으며, 그 가운데 21명이 암살당하거나 축출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혼돈의 시대에 미국은 아이티의 채무불이행을 빌미로 해병대를 파견하며 카리브해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얻고자 했다. 미 군정기(1915~1934년)에 미국식 헌법과 정치, 경제, 군부를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이 아이티 내에 제도화 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 최초의 흑인 국가 아이티는 군부의 권력이 집중되는 국가로 변모하며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이티 (내부의) 문제: 인종 간 정쟁 그리고 독재자의 정치경제적 무능
소수의 물라토(흑인과 백인의 혼혈)와 다수의 흑인 간의 권력 분쟁이 지속되었다. 수차례의 쿠데타가 반복되며 물라토와 흑인 간의 정권 창출이 교체되던 가운데 1957년 군부의 통제 아래 선거가 실시되었다. 흑인 다수파를 대변하는 뒤발리에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긴 군사독재를 종식시키며 문민정부를 창출했다. 그러나 집권 초기에 선정을 펼치던 뒤발리에는 최악의 독재자 파파독(Papa Doc) 10)이 되어 나라를 수렁으로 내몰았다. 특히 독재 정권 시절 부실한 산림정책으로 “아이티 (산이 많은 땅-선주민 티아노인 어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되었다. 국토 대비 3/4이 삼림이었지만 현재는 2%에 불과하다. 삼림황폐화는 2010년 쓰나미 발생으로 아이티가 초토화되는 단초가 되었고, 아이티는 다시 한 번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독립과 동시에 씌여진 빚(debt)이라는 굴레 속에 경제적 성장의 동력을 잃은 가운데 정치적 불안정성의 구조화와 환경적 재앙으로 아이티는 ‘온전한’ 자립국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나아가야 할 길 그리고 과제
아이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2010년 쓰나미 발생 이후 국제기구와 NGO 단체들이 일명 ‘장사진’을 연출했다고 한다. “아이티인들 보다 국제기구의 직원들이 더 많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세계 언론을 통해 전달된 바 있다. 식량 등 구호물품과 공적원조가 급진적으로 아이티에 유입되었다. 페트로카리브(Petrocaribe, 베네수엘라와 카리브해 국가들의 석유동맹) 자금 오용도 1차적으로는 쓰나미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기금으로 활용한다는 취지가 권력자들의 이권 및 탐욕과 맞물리며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 또한 현재의 정치, 경제적 동요와 불안정을 야기한 변수다.

아이티 국민은 있는데 국가가 보이지 않는다. 즉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 같지 않다. 무정부상태의 모습이다. 아이티의 기적을 위해서는 단순히 원조의 혜택이 아닌, 아이티 정부 차원의 리더십과 국민적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티뿐만 아니라 개별 국가의 성장 및 발전의 시발점은 인프라 구축에서부터 비롯된다. 아이티는 현재 전체 인구의 30%만 전기 공급 혜택을 받고 있으며 도심 외 지역인 시골 및 외곽지역의 거주자들은 6% 미만이 전기 공급을 받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 정부의 주요 정책인 ‘Caravan  of Change’의 실체적 성공이 ‘진흙 빵을 먹는 아이티’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요한 기제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정책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강력하며 올바른 리더십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미국을 위시로 하는 지역 및 국제사회 힘의 역학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베네수엘라의 파국으로 페트로카리브는 붕괴되었고 이후 국제사회 특히 미국의 영향권에 있는 IMF가 다시금 아이티의 경제, 사회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제적 단계의 구조성은 반정부 시위의 폭력성과 장기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하나의 변수이다. 즉 아이티 내부의 국내적 이슈에 대한 온전한 이해 및 설명은 실질적으로 구조화된 외부와의 역학관계를 동시에 살펴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 각주

1) 제국주의 시대, 미주지역의 패권의 변화 (프랑스->미국) 가운데 구조화된 결핍과 수탈의 역사가 오늘날 아이티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성의 지속화를 양산시키고 있음.
2) WorldBank/IMF
3) Haiti Libre, 2019.03.25. (검색일)
4) 미주인권위원회 (IACHR)에 발표에 근거하지만, 현지 인권단체는 이번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인한 사망자가 40명, 부상자는 82명이라고 밝힘.
5) El Caribe, Hoy, Listin Diario 등 현지 언론 일제히 보도함.
6) 생도맹그(Saint-Domingue)는 스페인이 불렀던 이 섬의 프랑스식 이름으로 산토도밍고 (Santo Domingo)의 프랑스식 표현임.
7) 로런트 듀보이스 (지음), 박윤덕 (옮김) “아이티 혁명사: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 2014: 20
8) 장자크 드살린(Jean-Jacques Dessalines)이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섬의 원주민인 타이아노 족의 언어로 나무가 많다는 뜻의 ‘아이티’로 국명을 정함.
9) 아이티 침공으로 발생한 전쟁은 양국 간 뿌리 깊은 불신과 혐오의 근원인데, 현재까지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 간의 외교, 경제적 관계는 소원한 상태임.
10) 뒤발리에의 애칭인 ‘파파독’ (Papa Doc)은 뒤발리에가 의사였던 것에 기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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