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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이슬람 극단주의의 맥락 분석: 개념, 변천, 그리고 전망을 중심으로
아프리카ㆍ 중동 일반 이주성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전임강사 2019/12/27
지난 10월 26일 ‘이슬람국가(Islamic State)’의 수괴인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가 미국의 공습(Operation Kayla Mueller)으로 사살되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가 “겁쟁이처럼 사망했다.”고 비하하며 작전 성공을 자축하였다(Baker and Schmitt 2019). 하지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 수괴의 제거가 소위 ‘글로벌 지하디즘(Global Jihadism)’과의 전투에서의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17년 12월, 이라크 정부는 시리아 접경지대 소도시인 ‘라와시(Rawa) 전투’에서 승리 후 공식적인 승전을 선포하였지만, 이내 성급한 판단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BBC 2017). ACLED(The Armed Conflict Location & Event Data Project) 보고서에 따르면, ‘이슬람국가’는 이후 이라크 내에서만 약 900건의 소모전 및 테러 행위를 감행하면서 존재감을 유지하였다(ACLED 2018).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알-바그다디 사망 이후 ‘이슬람국가’ 대변인은 “미국은 기뻐하지 말라. 우리는 잔존하고 확장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CBS News 2019). 알-카에다(Al-Qaeda) 처럼 중앙조직은 와해될 지라도, 점조직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다가 역내 새로운 권력 공백이 발생할 경우, 다시 활개를 칠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 후, ‘이슬람국가’는 일련의 테러 사건1) 을 자신들의 보복소행이라고 선포하였고, 지난 11월 12일 독일에서 대량의 폭발물을 소지한 ‘이슬람국가’ 지지자가 테러 용의자로 체포되면서, 연말연시 및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 세계에서 테러 위협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글로벌 지하디즘’의 맥락을 분석하여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있다. 우선 이슬람 극단주의가 태동하게 된 배경을 간략히 짚어본 후, 이슬람 극단주의와 관련된 개념을 정리함으로써 이슬람에 대한 왜곡 내지는 오해가 존재함을 소개하겠다. 그 후, 알-카에다를 위시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어떻게 이를 악용하고, 그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계가 어떻게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에 동참하였는지 살펴보겠다. 마지막으로 ‘근절 내지는 종식이 될 수 없는 전쟁’인 이슬람 극단주의와의 싸움에 대한 함의를 도출해 보도록 하겠다.
이슬람 극단주의의 태동: 이슬람 원리주의 vs 급진주의 vs 극단주의2)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부 언론이나 저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와 원리주의를 동의어로 취급하는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이주성 2019, 52). 하지만 이는 잘못된 개념이다. 모든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이슬람 원리주의 원칙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극단화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 이슬람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7세기 말 서구의 침탈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는 찬란한 문명과 광활한 영토를 가진 거대 제국을 여러 차례 운영하였다. 특히, 압바스 왕조(750~1517)는 유럽의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칠 만큼 철학, 기술, 예술, 문화 전 분야에서 인류 문명의 중심이었고, 오스만 제국(1299~1922)은 ‘불멸의 제국(Devlet-i Ebed-müddet)’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위대한 제국을 건설한 바 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제국은 내부적 문제와 외세의 침략에 의해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오스만 제국이라는 정치 권위의 붕괴뿐만 아니라 이슬람 세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이슬람 부흥주의 운동이 시작된다. 서구의 사상과 제도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 법체계(샤리아)와 상충되기 시작했고, 일부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이슬람 사회가 ‘오염’되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살라피 운동(Salafism)3)이었다. 과거 완벽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를 회복하고, 이슬람 원리(유일신, 쿠란 및 하디스에 대한 강조, 샤리아에 의한 통치 등)에 기반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복고주의/부흥주의 운동4) 인 것이다. 소위 원리주의자 내지는 근본주의자/전통주의자로 불리던 이들은 18~19세기에 걸쳐 정치 제도나 체제의 건설보다는 이슬람 율법학적 측면에서 비폭력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면, 19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세력은 근대 개혁주의자들로 지칭되었는데, 유학파 엘리트들이 구심점 역할을 했다. 서구의 문명(기술, 근대화, 제도 등)을 수용하여 이슬람과 조화시키자는 취지로, 이슬람의 핵심 가치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융통성 있는 샤리아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자말 앗딘 알-아프가니(Jamal al-Din al-Afghani), 이집트의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원리주의 및 개혁주의 운동에 큰 걸림돌이 등장하게 된다. 실용주의자로 지칭된 세력들로, 이들은 서구화(Westernization)를 근대화로 간주하였다. 비록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재력과 권력을 확보(Authoritarian Bargaining)하였기 때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원리주의자들의 율법적 조언을 무시하고, 급기야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시도하면서 세속주의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개혁주의 세력을 탄압하여 여러 조직을 해체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과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한다. 우선 이슬람 개혁주의자 일부가 먼저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무슬림 사회를 파괴하는 실용주의자들의 정권을 혁명 등 급진적(radical)인 방법을 통해 전복하자는 운동을 개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을 창시한 하산 알-반나(Hassan Al-Banna)가 그 시발점이었다. 그의 사상은 사이드 쿠틉(Sayyid Qutb)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더욱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한 사회 건설을 주장하였고, 보다 적극적인 행동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한편, 이슬람 원리주의자/전통주의자들 중 일부는 테러나 암살을 통해 실용주의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 무차별적인 폭력까지도 용인하는 이슬람 극단주의(Extremism)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사이드 쿠틉의 행동주의 사상을 차용하며 자신들의 불법적 폭력을 정당화하였다. 결국 차후에 이러한 논리를 가장 적극적이고 교묘하게 활용한 집단이 알-카에다 등과 같은 극단주의 단체들인 셈이다.
지하드의 정의와 지하드 개념의 왜곡: 정치적 이데올로기화
이슬람 극단주의를 설명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지하드(Jihad)이다. 지하드의 원어적 의미는 “신의 길 위에서 정의, 의무 또는 가치가 있는 목표를 위해 헌신적으로 전심전력하여 노력‧분투‧투쟁하는 것”이다(이주성 2019, 54). 그리고 이러한 지하드는 “고결한 정신과 도덕성을 함양시키기 위해 부단히 자신 내부의 악과 투쟁”하는 큰 지하드(정신적 측면)와 “불의와 압제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행위 또는 이슬람을 전파하고 수호하기 위해 쏟는 무력투쟁의 전투행위”인 작은 지하드(육체적 측면)로 구분된다(손주영 2006, 30-32).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작은 지하드, 즉 육체적 무력투쟁 부분이다. 작은 지하드의 연원은 무함마드 시대 5차례의 군사 원정을 통한 신앙전파 및 정복 운동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1세기부터 시작된 십자군 침략, 13세기 몽골의 침략 등에 대한 대항 모두 작은 지하드의 수행 맥락으로 간주하였다 (Cook2015, 49-56).5) 다만, 이러한 지하드 사례는 지하드의 수행에 있어 정당성, 즉 목적 및 수단의 정당성(방어적 측면, 이슬람 신앙 및 공동체의 수호를 위한 최소한의 무력투쟁)이 확보된다는 측면에서 정당화되어 왔다.
하지만 상당수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이러한 지하드 개념을 왜곡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선 꾸란의 일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사이트 쿠틉의 지하드관을 재구성하여 부당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알-카에다의 수괴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다. 그는 자의적으로 해석한 사상을 기준으로 삼아, 작은 지하드의 수행이라는 합리화를 통해 자신들의 폭력행위를 정당화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지하드를 수행하는 순교’라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테러행위를 숭고한 희생 내지는 승리로 포장한 것이다(Brachman 2009, 51).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알-카에다는 여러 건의 테러를 감행하였다.6)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2001년 9.11 테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을 보다 세련되고 대중적으로 풀어내어 파급력을 극대화한 세력이 바로 ‘이슬람국가’였다.
지하드 개념에 대한 서구의 왜곡과 편견의 누적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서구 세력 또한 지하드 개념을 왜곡했다는 점이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세력 또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하드 개념을 왜곡하였고, 이러한 왜곡이 점차 일반 대중에게 누적되면서 편견이 심화하기 시작하였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시각에서 비롯된 서구의 이슬람에 대한 편견은 20세기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냉전에서 궁극적으로 승리를 쟁취한 미국의 외교정책 입안자들은 새로운 외교 기조 실행을 위해 ‘새로운 적’이 필요했다.
부시 행정부(1989~1993) 내 주요 정책 결정자들은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 이론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차후 ‘이슬람 문명’이 미국 주도 국제질서에 대항할 세력이 될 것이라는 가정을 세웠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아프간 전쟁에 참여했던 무자헤딘(Mujahideen) 전사들이 조국으로 복귀하여 서구 세력을 공격할 것이라는, 부정확하고 다소 과장된 첩보에 의존하여 막연한 시나리오를 수립하였다.
당시 ‘로커비 사건’이나 1989 UTA 항공기 테러 등으로 인해 위협을 느낀 미국 국민들이 이러한 설정에 동조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편견이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9.11 테러를 겪으면서 이러한 이슬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증오 내지는 두려움은 극에 달하였다. 미국 일부 극우 언론들은 앞다투어 보다 자극적인 기사를 통해 이슬람을 악마화하고 ‘모든’ 무슬림들을 테러리스트로 매도하면서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를 증폭시켰다(Pew Research Center 2006). 지하드 개념 또한 왜곡시켰다. 지하드를 테러리즘과 동일한 용어로 소개하였고, 이러한 미국 언론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언론들도 지하드를 성전 내지는 정복 전쟁을 합리화하는 수단 정도로 왜곡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어디서도 지하드 개념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지하디즘(Jihadism)7) 을 구분해야 하며, 테러리즘은 이슬람 자체가 아닌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문제라고 지적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단순히 알고 싶지도, 알더라도 증오의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치적으로 구성된 개념이 실제 대중들에게는 하나의 사실처럼 간주되어 현재까지도 쉽사리 수정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결론: 이슬람 극단주의의 미래
2017년 12월, ‘이슬람국가’는 공식적으로 패망하였다. 그리고 2019년 10월, 설립자이자 수괴인 알-바그다디가 제거되면서 ‘이슬람국가’라는 역사상 최악의 지하디스트 그룹은 여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궁극적인 승리 내지는 전쟁의 종식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리어, 기존에 ‘이슬람국가’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상징성, 그리고 여전히 기저에 존재하는 네트워크가 수시로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다.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는 국제사회의 최대 위협이 되었고, 동시에 군소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에게는 ‘시대의 영웅’이었다. 다양한 지하디스트 단체들은 알-카에다의 활동에 기여하기를 원했고, 알-카에다는 하나의 이념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서정민 2008, 97). 충성경쟁이 이어졌고, 수많은 테러가 알-카에다의 기치 아래 감행되었다. 알-카에다, 그리고 지하디즘이 글로벌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슬람국가’ 또한 상당 기간 그 ‘명성’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 하나를 제공한다. 지하디스트와의 싸움은 결말이 없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타협이나 조정이 불가능한, 나의 파멸이 목적인 적의 공격을 예방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현실이다. 지난 부시 행정부는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전방위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하였고, 그 결과는 주지하듯이 대 실패였다. 현재 이라크의 대혼란, 아프간의 재앙적인 상황이 이를 방증한다. 미국의 슈퍼 파워로서의 힘에 대한 맹신,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 등에서 비롯된 오만과 착각에 가깝다.
오바마 행정부가 선택한 대안은 ‘폭력적 극단주의 대응(CVE: countering violent extremism)’ 전략이다. 약 8년간의 ‘테러와의 전쟁’ 피로감, 그리고 거버넌스 확충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즉, 모기를 잡기 위해 파리채를 더욱 크게 만들고 더욱 강하게 휘두르기 보다는, 모기가 알을 낳을 수 없게끔 늪을 숲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역내 삶의 환경을 개선하여 사람들이 지하디즘에 경도되는 것을 예방하자는 차원인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아랍의 봄’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이러한 오바마의 대안은 지금쯤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사국인 무슬림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국제사회도 전반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극단주의는 근절되는 성질이 아니다. 관리와 예방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보다 적절하고 정확한 대책 마련이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각주
1) 말리 북부 군부대 테러(11.2), 태국 검문소 테러(11.6), 런던 흉기 테러(12.1), 아프가니스탄 동부 차량 테러(12.4) 등
2) 사실 정치적 이슬람(Political Islam) 측면에서 이슬람 세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다양한 세력이 난립하고 있으며, 비슷한 부류 간에도 각자의 입장과 노선이 상충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 글에서는 이를 최대한 단순화하여 개념적 측면으로만 구분하기로 한다. 즉, 이슬람 원리주의, 이슬람 급진주의(변화 추동 속도 측면), 그리고 이슬람 극단주의(변화 추진 방법 및 수단 측면) 세 가지 맥락으로만 논의를 진행토록 하겠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Peter Mandaville의 Islam and politics (Routledge, 2014) 참조.
3) 살라프(Salaf)는 신실한 선조(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를 의미한다.
4) 살라피 운동의 실천적 예시로는 14세기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이슬람 신앙과 공동체를 지키자는 이븐 타이미야(Ibn Taymiyyah)의 부흥주의 운동, 그리고 18세기 압드 알 와합(Muhammad ibn Abd al-Wahhab)의 와하비즘(Wahhabism) 운동 등이 있다.
5) 자세한 여타 역사적 사례는 서정민 교수의 글 “테러리즈미즘과 알카에디즘: 국제테러의 구조적 배경” 참조. 서정민(2008), 『한국중동학회논총』 28권 2호, 89-111.
6) 1992년 12월 예멘 아덴 소재 호텔 폭탄테러를 기점으로 1993년 2월 뉴욕 무역센터, 1995년 11월 사우디 리야드 소재 미군기지, 1996년 6월 사우디 코바르(Kobar) 연합군 관사 폭탄테러, 1998년 8월 케냐 나이로비 및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소재 주미대사관 동시다발 폭탄테러 등.
7) 서구 세력 및 그 동조 세력에 대한 비대칭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정당하지 않은 폭력을 사용하고, 이를 ‘지하드의 수행’이라고 합리화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Bonney 2004,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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