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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돈바스 사태를 둘러싼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해법과 러시아의 대응

러시아 / 우크라이나 조준배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2020/05/04

들어가며
2019년 12월 9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위치한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Palais de l'Élysée)에서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이 주관하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가 참석하는 4국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른바 ‘노르망디 형식 회담’(Normandy Format) 또는 ‘노르망디 4자회담’(Normandy Four)이라 불리는 본 회동의 주요 의제는 2014년 봄 우크라이나의 돈바스(Donbass)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분쟁 사태의 해결책에 관한 것이었고 합의안 도출을 위해 핵심 당사국의 지도자들인 젤렌스키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사이의 1시간 20분에 걸친 양자회담을 포함하여 무려 5시간 동안 마라톤 논의가 진행되었다. 
 
회담이 끝난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상들 사이에 약속된 사항을 준수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 다짐하며 러시아의 적극적인 협력을 추가로 주문했고 푸틴 대통령은 분쟁의 얼음이 이미 녹아내리기 시작했다고 화답하며 해결 절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메르켈 총리도 회동 결과에 만족감을 피력한 뒤, 어려움이 많지만 관련 국가들이 여전히 최종 해결에 ‘선의’를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했고 마크롱 대통령은 주최국 호스트로서 회담의 성사 자체가 큰 성과임을 부각시키며 4개월 뒤에 또 다른 만남이 예정되어 있음을 밝힘으로써 낙관적인 전망을 내비쳤다. 현지 언론을 비롯한 각국 신문사 및 방송국들 또한 협상 내용과 의의를 앞 다투어 보도하며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돈바스 문제에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기대했다.

파리회담의 핵심 의제인 돈바스 사태는 사실 2014년 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러시아계 주민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친러 성향의 반정부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비화하여 독립 국가의 수립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비롯되었다. 러시아는 이 과정에서 분리주의 반군들에게 군사 및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한편으로 파병을 통해 직접 개입했고 압도적 공세를 취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유럽연합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양 당사국 또는 중재국을 포함하는 다자회담 등의 형식으로 두 차례의 협정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지만 합의 사항의 실행을 둘러싸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으면서 사실상 답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가운데 2019년 5월, 우크라이나의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젤렌스키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국정과제의 주요 어젠다로 제시하자 돈바스 사태의 해결 논의는 새로운 동력을 얻게 되었다. 
 
2016년 10월의 베를린 회담 이후 3년 만에 파리에서 다시 열린 노르망디 4자 회동은 바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이니셔티브와 새로운 접근법을 선보이고 검증받는 시험대였다. 무엇보다 과거 돈바스 사태의 교전국이자 현재 협상의 핵심 파트너로서 오랫동안 우크라이나의 해법을 거부해왔던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을 설득해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우방이면서도 동시에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도 만족시켜야 했다. 과연 젤렌스키 대통령의 해법은 회담 안팎에서 제기되는 요구들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분쟁의 확실한 해결을 보장하고 유럽대륙의 평화와 국제사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을까. 이 글은 그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하여 파리회담의 성과와 의미를 바탕으로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해결책이 지니는 가능성과 한계를 러시아와 관련지어 살펴보려 한다. 즉 동유럽 국가들 사이의 분쟁을 중심으로 배후에 얽힌 복잡한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탐구해봄으로써 코로나 사태 이후 태동하게 될 새로운 세계질서의 한 구성변수가 지니는 지정학적 함의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파리회담의 성과와 특징 
파리회담의 핵심 성과는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연말까지 ‘완전하고도 전면적인’ 휴전과 포로 교환 및 철군에 합의했다. 즉 2019년 12월 31일까지 양국은 교전을 중단하는 동시에 분쟁 관련 억류자들을 모두 석방하고 교환하며 돈바스 지역 내 세 곳의 전장에서 군사 장비를 포함한 병력 전체를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둘째, 2015년 2월, 돈바스 사태의 해결을 위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되었던 제2차 민스크 협정(Minsk II)의 성실한 이행에 동의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도네츠크 인민공화국(DPR: Donetsk People’s Republic)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LDP: Luhansk People’s Republic)에 대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특별 지위 부여 및 지방선거 실시 관련 조항이 재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당사국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를 보장하기 위해 ‘노르망디 형식 회담’을 4개월 내에 다시 개최하기로 뜻을 모았고 그 밖에 지뢰제거 계획의 갱신과 검문소의 증설과 같은 문제들이 추가로 논의되었다. 
 
회담의 결과를 뒷받침하는 후속 조치들도 이어졌다. 일단 전선에서의 총성이 그쳤고 분리주의 반군은 79명(일부 보도는 76명)을 석방했으며 정부군은 124명(일부 보도는 141명)을 풀어주었다. 2019년 12월에는 우크라이나 국회가 2014년에 제정된 ‘반군점령지역 자치 관련 특별법’의 효력을 2020년 말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했고 젤렌스키 대통령 또한 우크라이나 지방 전역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지방분권화’ 개헌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러시아도 상응 조치로 2019년 마지막 날, 국영기업 가즈프롬(Gazprom)을 내세워 양국 간 또 다른 갈등의 원인이 되어왔던 우크라이나 경유 유럽행 가스관의 이용을 2024년까지 늘리기로 나프토가즈(Naftogaz) 회사와 계약했고 2020년 2월에는 푸틴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며 돈바스 사태의 추이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파리회담은 합의된 내용만큼이나 형식면에서도 이전의 회담들과 차별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즉 2014년 이래 참가국들이 고수해온 민스크 협정의 완전 준수라는 경직된 입장에서 탈피하여 2015년 독일 외무장관이었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Frank-Walter Steinmeier)가 새롭게 제안한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었다. 현재 독일 대통령이기도 한 슈타인마이어 장관은 당시 제1차 및 제2차 민스크 협정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돈바스 문제에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전체 조항들 가운데 비군사적 항목들의 선제적 실행을 담은 구상을 내놓았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의 감독 하에 우크라이나 헌법에 명시된 선거를 실시한 뒤, 투표가 정당하게 진행되었다고 판단될 경우, 선거 당일 제정한 특별자치 지위 관련법을 시행하고 우크라이나는 동부지역에서 러시아 국경에 대한 통제권을 반납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슈타인마이어 방식(Steinmeier formula)이라 불리는 민스크 협정의 축약판은 2016년 가을 베를린 회담에서 공인되었으나 이후 노르망디 4자회담이 공전되면서 사실상 폐기된 상태에 놓였다가 2019년 젤렌스키 대통령의 수용 결정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하지만 파리회담에서 확인된 슈타인마이어 방식을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점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선거 전에 러시아 군을 포함한 모든 무장단체 및 무기가 분쟁지역에서 철수되어야 하며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한 러시아와의 국경 통제권 또한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도 러시아계 정당만이 아닌 우크라이나 정당 출신의 후보자들에 대해서도 참여가 보장되어야 했다. 반면 푸틴 대통령은 ‘민스크 협정의 대안은 없으며 합의사항의 실천을 위해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며 철군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국경통제권 환수는 선거 후에나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즉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한 지역에 자치권이 합법적으로 부여되고 나면 반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2015년 2월에 체결된 제2차 민스크 협정의 제9항에는 분쟁지역의 러시아 국경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통제권 행사가 선거 다음날부터 가능하다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새로운 해법과 서방의 태도 
슈타인마이어 방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파리회담의 개최에 적극적이었던 젤렌스키 대통령의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바스 사태의 진상과 그동안 우크라이나 정부가 보여 왔던 태도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회담의 핵심의제였던 돈바스 사태의 기원은 무려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년 1월,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Victor Yanukovych)가 유럽연합과의 제휴협정(Association Agreement)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자 유럽통합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마이단 광장에서 퇴진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이듬해 2월, 혁명의 성공으로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로 망명한 뒤, 푸틴 대통령은 다음 달, 친러 시위의 보호를 빌미로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무력으로 합병했다. 돈바스 지역에서도 같은 달, 친러 시위가 발생하여 무장투쟁으로 비화하면서 4월 들어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러시아는 직접 군대를 파병하며 개입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군의 파상적인 공세에 밀려 잇따른 패전 끝에 수도권 지역을 상실할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유럽연합의 개입 하에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2014년 가을과 2015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가까스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특히 제1차 민스크 협정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유럽안보협력기구가 참여하는 삼자접촉그룹(Three Contact Group)이 주축이 되어 돈바스 지역의 반군 대표들과 함께 합의한 조약으로 러시아의 추가 진군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재개된 도네츠크 공항 전투와 데발쩨베(Debaltseve) 전투로 빛이 바랬고 역시 우크라이나가 모두 패배하면서 제2차 민스크 협정이 다급하게 성사되었다. 전투가 중지되고 평화가 도래했지만 우크라이나 정부는 반군 장악 지역을 상대로 자국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헌법의 개정을 통해 선거를 실시한 뒤, 특별 자치지위를 부여한다는 굴욕적인 조항을 수용해야 했다. 게다가 휴전 자체도 규정대로 준수되지 않아 양 진영 사이의 교전상태가 산발적이긴 하지만 6년 넘게 지속되면서 1만 3,000명이 사망하고 2만 5,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250만 명의 주민이 고향을 등지는 비극적 상황이 벌어졌다. 

돈바스 사태가 일어날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었던 페트로 포로셴코(Petro Poroshenko)는 협정의 체결로 일단 위기를 모면하자 유럽연합과 나토와의 긴밀한 결합을 기조로 하는 정부의 외교정책을 고수하면서 동부지역에서의 무력분쟁 종식과 크림반도의 합병 무효화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워 다시 러시아와 대립했다. 그리고 2018년 2월에는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및 나토 가입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한 뒤, 민스크 협정을 무시하고 러시아를 침략자로 공개 지목하는 ‘임시 점령지역에서의 국가 주권 수호’ 법안에 서명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분쟁 지역에서 반군에 의해 실시된 선거를 철군과 같은 안보환경의 변화라는 협정의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한 투표라 주장하며 조약 위반이자 불법 행위라 못 박고 미국과 유럽연합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포로셴코 대통령의 일관된 반러시아 입장은 이듬해 2월,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향한 ‘전략적 경로’(strategic course)를 실행하는 데 있어 우크라이나 정부의 책임을 공식 천명하는 헌법 개정으로 이어졌고 여름에는 직접 유럽연합과 나토의 지도자들을 만나 ‘전략적 경로’에 대한 상호 이해를 확인했다.

하지만 2019년 4월, 정치 경력이 없는 코미디언 출신의 젤렌스키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대러 정책은 급변했다. 포로셴코와 마찬가지로 유럽연합 및 나토 가입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취임 직후 돈바스 사태의 해결을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고 6월에는 유럽연합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크렘린과 회담을 재개할 용의가 있음을 전달하며 외교적 경로를 통해 직접 푸틴 대통령에게 민스크에서의 회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러시아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적극적 구애는 곧 결실을 맺어 7월 초 처음으로 푸틴 대통령과 통화하며 포로석방 문제를 전문가 수준에서 논의한다는 데 합의했고 두 달 뒤에는 실제로 양국 사이에 70여명의 포로들이 교환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1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슈타인마이어 방식의 채택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도네츠크 공화국과 루한스크 공화국에 특별지위를 부여하는 평화 로드맵을 수용했고 파리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된 철군조치도 반군과 공동으로 실행에 옮겼다.  
 
우크라이나의 대러 정책이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과 더불어 급격히 전환된 배경에는 돈바스 사태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절박한 상황인식이 숨겨져 있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여 크림반도를 비롯한 동부지역을 회복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희박했고 2014년 이래 지속되고 있는 산발적인 교전상태는 언제든 분쟁의 재발로 이어져 우크라이나 전역을 위험에 빠뜨릴 우려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자발적으로 돈바스 지역을 포기할 전망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외교적 해법만이 양국 사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젤렌스키 대통령은 반군 장악지역에 특별 지위를 부여하는 조항을 비롯하여 민스크 협정의 요구사항과 실행에 필요한 모든 조치들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천명하고 다만 국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반군 장악지역에서의 국경통제권 환수 시기를 제2차 민스크 협정에 제시된 선거 후가 아닌 이전으로 변경하여 발표했다. 즉 국내의 부정적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슈타인마이어 방식의 수용을 선언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내용을 부분 수정하는 편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한편 유럽연합은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우크라이나의 유화적인 제스처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표가 있은 다음 달, 유럽연합의 주요 지도자인 마크롱 대통령은 주간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고립적으로 번영할 수 없다’고 질타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촉구했고 노르망디 형식 회담의 주도자였던 메르켈 총리는 망명 신청자 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하며 회담장에 나올 것을 압박했다. 사실 유럽연합은 2014년 3월 이미 ‘심화 포괄적 자유무역지대’(DCFTA: Deep and Comprehensive Free Trade Area)를 포함하는 제휴협정을 우크라이나와 체결하며 현재까지 오랜 우방관계를 맺어왔고 민스크 협정 체결 후인 2016년에는 나토가 바르샤바 정상회담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의 군대를 위한 훈련 및 기술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2019년 봄, 젤렌스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에는 유럽연합의 수도 브뤼셀이 첫 해외 방문지로 결정되었고 6월에는 유럽연합과 나토 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경로’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미국 또한 유럽연합의 입장과 다르지 않았다. 2019년 7월, 미 국무부는 노르망디 형식 회담의 정기적 개최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종래와는 다른 전향적 접근법에 긍정적 반응을 나타냈다. 그리고 같은 달, 우크라이나 혁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이른바 ‘위엄혁명’(Revolution of Dignity)의 5주기 기념일 관련 결의안을 상원에서 통과시켰고 러시아에 대해서도 돈바스 사태와 관련하여 취해진 제재조치들이 지속적으로 실행되어 9월까지 위반 건수가 무려 655건을 기록했다. 사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오랜 맹방으로 1994년 우크라이나의 핵 확산 금지 조약 가입과 현 국경에 대한 주권 확인 등을 약속하는 부다페스트 안전보장각서(Budapest Memorandum)에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이 미국 대외정책의 주요 기조가 되었고 2015년 제2차 민스크 협정의 체결과 이후의 자치 선거 실시 등 분쟁관련 문제에서도 러시아와 부딪치며 일관되게 우크라이나의 입장을 옹호해왔다. 경제적으로도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원조를 받는 유라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대 수혜국으로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연평균 3억 2,000만 달러를 수령했다.

러시아의 대응 
젤렌스키 대통령의 새롭지만 변칙적인 접근법에 대한 러시아의 반응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와 관련한 크렘린 외교정책의 변천과정을 추적해보는 연대기적 탐색이 필요하다. 사실 돈바스 사태가 발발하기 전부터 양국 사이의 관계는 매우 껄끄러운 상태였다. 소련의 몰락 이후 독립하게 된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 및 나토와의 적극적인 협력을 새로운 외교노선으로 설정하고 1994년 나토의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Partnership for Peace)에 가입하는 등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가속화했다. 하지만 이는 서방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며 우크라이나를 안보 차원의 완충국가로 바라보던 러시아의 우려로 이어졌고 우크라이나의 영토인 크림반도에 기지를 두고 있는 러시아 소속 흑해함대의 지위 또한 모호해졌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통과하여 유럽에 도달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관도 외교적 갈등의 원천이 되었다. 다행히도 2010년 친러시아 노선을 표방하는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대통령의 취임으로 양국 관계는 잠시 우호적인 국면에 돌입하긴 했으나 임기 중 유로마이단(Euromaidan) 사태로 탄핵되며 친서방 성향을 보이는 포로셴코 대통령이 등장하자 다시 악화되었다. 

2014년 발생한 크림반도의 강제합병과 돈바스 지역에 대한 무력침공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행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크렘린의 강력한 의지가 표명된 사건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민주화와 더불어 유럽연합 및 나토 가입을 요구하는 키예프 시민들의 시위를 ‘파시스트 쿠데타’로 규정하고 분리주의 반군에 대한 각종 지원을 비롯하여 정규군 파병 등 군사적 개입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공세를 통해 우크라이나 정부군을 무력화시키며 크림반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에 ‘새로운 러시아’(Novorossiya: New Russia)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러시아 국민들은 열광했고, 2012년 대선에서 승리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예전 같은 지지를 누리지 못하고 있던 푸틴 대통령의 인기는 민족주의의 광풍이 몰아닥치면서 무려 80%까지 치솟았다. 서방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안보적 차원뿐만 아니라 국내 상황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도 우크라이나 침공은 크렘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의 등장 전까지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는 결코 누그러지지 않았다. 2015년 제2차 민스크 협정의 체결 이후 푸틴 대통령은 안보환경에 상관없이 반군 지역에 특별지위를 영속적으로 부여하는 법을 즉각 제정하라고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요구했고 돈바스 사태로 인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제재조치를 피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부인하며 분쟁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분리주의 반군 사이의 내전으로 축소 규정했다. 또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내에 주둔하고 있는 자국 병력을 2015년까지 1만 2,000명 수준으로 대폭 증강시켰고 3년 뒤에는 분쟁지역에서 일방적인 선거를 실시하며 민스크 협정에 저촉되지 않는 합법적인 투표임을 강변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흑해와 아조프(Azov) 해를 잇는 케르치(Kerch) 해협을 통과하던 우크라이나 국적의 함정 세 척을 나포함으로써 과거 양국이 체결했던 안전 통과 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했고 2019년에 들어서는 도네츠크 및 루한스크의 ‘특정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러시아 시민권 취득절차를 완화하고 확대했다. 
 
하지만 2019년 4월, 젤렌스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국정의 주요 과제로 포함시키자 크렘린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7월 중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유럽안보협력기구 대표들로 구성된 삼자접촉그룹 회의에서 ‘여름 휴전’이 합의되었고 크렘린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Dmitry Peskov)는 월말로 예정된 우크라이나의 총선이 끝난 이후부터는 양국 간의 더 많은 쟁점들이 해소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다음 달, 푸틴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의 초청에 응해 지중해 연안의 여름별장인 브레강송 요새(Fort de Brégançon)에서 장시간 회담을 가졌고 10월 젤렌스키 대통령의 발표 이후에는 슈타인마이어 방식의 완전한 수용을 위한 추가 노력을 주문하는 한편으로 지난 2018년 11월에 나포했던 우크라이나 함정 3척을 반환하는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그리고 분리주의 반군도 11월 첫째 주부터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함께 돈바스 지역의 졸로테(Zolote) 시에서 단계적인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2019년 12월, 파리회담이 개최되자 푸틴 대통령은 회동이 성사되기 전까지의 유화적인 태도와는 달리, 민스크 협정 외에 대안은 없으며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국경 통제권은 분쟁지역에서의 선거가 실시된 이후 반환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뒤늦은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는 회담이 열리기 전 우크라이나 정부에 2016년 이래 중단된 가스수입의 재개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슈타인마이어방식의 완전한 수용을 선결 조건으로 제시했다. 즉 크렘린은 국제사회 내의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 협상주체로 복귀하기 위해 회담의 개최를 수용하는 한편으로 돈바스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는 과거의 입장에서 ‘단 1mm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보이는, 이른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강온 양면전략을 구사한 것이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2020년에 들어서도 러시아 정부 내의 우크라이나 정책 담당자이자 침략 전쟁을 기획했던 강경파 인사 블라디슬라브 수르코프(Vladimor Surkov)를 온건파인 드미트리 코작(Dmitry Kozak) 부총리로 교체하는 한편 돈바스 지역의 최전선에 위치한 졸로테 시에서 분리주의 반군이 전투를 재개하는 사태를 방치했다.

함의와 전망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이니셔티브로 성사된 파리회담은 개최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 회동이었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지도자가 푸틴 대통령과 처음 만나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를 나눔으로써 분쟁의 핵심 당사국들이 군사적 행위가 아닌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경로를 통해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 자리였다. 양국 간의 소통채널이 다시 열린 셈이었고 휴전 노력이 재개된 신호였을 뿐만 아니라 중재국의 조정을 통해 단계적으로 신뢰를 구축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파리회담은 분쟁의 핵심 쟁점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슈타인마이어 방식을 수용했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일부 입장을 수정하여 분쟁지역에서의 선거 전 철군과 국경통제권의 회복을 주장했지만 거부당했고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점령의 국제적 정당성과 제재 해제 및 서방과의 관계 정상화와 같은 성과를 기대했으나 협상 주체로 복귀했다는 수준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회담에서 약속된 포로교환과 철군 그리고 휴전은 양국이 사태 해결의 진전을 증명하기 위해 도출한 최소한의 결론이었고 중재국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은 조정의 실패를 인정하고 추가 회담을 기획해야 했다.

회담 이후 우크라이나의 입지는 크게 축소되었다. 파리에서 러시아와의 견해차를 확인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슈타인마이어 방식을 수정 없이 전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해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전자는 우크라이나 주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고 후자는 쉽지 않았다.  이미 국내에서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이니셔티브에 반대하는 ‘투항 반대’(anti-capitualtion)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고 대통령 지지율도 10월 선언 전인 2019년 9월 73%에서 파리회담 후인 2020년 1월에는 49%까지 폭락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성난 국민을 달래기 위한 유화책으로 3월, 내각을 전면 개편하며 외무장관에 친서방주의자인 드미트로 쿨레바(Dmytro Kuleba)를 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꾸준히 푸틴 대통령과 통화를 하며 대화의 끈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정부는 파리회담 개최 전에 미리 크렘린에 가능성을 타진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대러 협상에 대한 의지가 여전함을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양면정책은 결국 러시아의 이중 전략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오히려 무게중심은 더욱 서방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그 실행범위 또한 약소국으로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돈바스 사태를 바라보는 러시아의 기본 시각은 파리회담의 개최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전혀 바뀌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일관되게 민스크 협정의 완전한 실행을 주장해왔고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를 위협하는 서방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완충국가일 뿐이었다. 슈타인마이어 방식을 통해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이 특별 자치 지위를 부여받게 될 경우에도 크렘린의 전략은 이들을 트로이의 목마로 활용하여 인접국인 우크라이나를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화된 연방국가로 전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적극적인 제스처에 대한 긍정적인 대응은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서방의 제재조치를 완화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일시적 방편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푸틴 대통령이 실제로 원하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또한 돈바스 지역이 아닌 구소련 시절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이어 제3의 공업지대로 평가받던 하리코프(Kharikov)나 흑해함대의 작전반경을 넓힐 수 있는 항만도시 오데사(Odessa)와 같은 이른바 ‘새로운 러시아’ 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왕관의 보석(crown jewel)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반면 미국과 유럽연합은 돈바스 사태의 근본 원인과 책임이 모두 러시아에 있다는 입장이다. 2014년 푸틴 대통령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장악은 소련을 비롯한 33개 유럽 국가들이 서명했던 1975년 헬싱키 최종합의서(Helsinki Final Act)의 핵심 조항인 영토 불가침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이기에 불법이며 점령지 또한 모두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를 상대로 취해진 각종 외교 및 경제적 제재조치도 유럽의 안보질서를 훼손한 데 대한 정당한 대응이었고 따라서 크렘린의 가시적인 해결 노력 없이는 철회는 불가했다. 우크라이나의 평화 이니셔티브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2020년 1월 말, 국무장관 마이클 폼페이오(Michael Pompeo)가 키예프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에 대한 안전보장과 외교적 노력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다. 유럽연합도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분쟁의 조기해결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 미국과 다르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친서방정책을 뒷받침하고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미 국무부 우크라이나 협상 특별대표 커트 볼커(Kurt Volker)의 사임으로 이후 미국의 개입이 다소 약화되고 유럽연합과 나토도 당분간은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의사가 없어 젤렌스키 대통령의 노력이 한동안 공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파리회담에서 확인된 당사국과 중재국 사이의 신뢰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해결이 없는 상태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양국 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한 모습을 노정하고 있다. 실제로 2020년 2월 18일에 졸로테 시에서 일어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분리주의 반군 사이의 전투는 협상 진전의 결과나 노력들이 얼마나 손쉽게 뒤집힐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궁극적인 해결책이 도출되지 않는 한 돈바스 지역은 저강도 분쟁지대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과 유럽연합의 제재완화를 얻어내기 위해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의 경제 지원을 제공받기 위해 돈바스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철수하거나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돈바스 지역에서 분쟁이 재개되어 추가 살상자가 속출할 수도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러시아의 압력에 맞서면서 보다 실행 가능한 새로운 평화협정을 제시하고 프랑스와 독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요컨대 지금이야말로 젤렌스키의 새로운 접근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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