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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 오피니언] 폴란드 자유 노조 운동에 대한 소고

폴란드 이무성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0/11/19

폴란드 민주화 운동의 배경
냉전이 종식된 지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폴란드의 민주화 과정은 국제 체제 변화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건 임은 분명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공산 정부의 붕괴는 너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공산정권의 붕괴는 대내외 여러 여건의 변화와 함께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배경 속에, 본 원고에서는 폴란드 공산정권의 붕괴가 어떻게 자유 노조 활동과 연관되어 발생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특히 자유 노조 활동이 어떻게 향후 민주 선거의 근간이 된 원탁회의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어떤 제도적 틀이 마련되어 민주 선거가 치러졌으며, 또한 이로 인해 민주 정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폴란드 민주정부의 탄생은 폴란드 민주주의 여정 그 자체에 중요한 함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와 같은 현대 국제 정치의 기저 가치가 어떻게 쟁점화되고 구현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주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폴란드 공산정권의 붕괴의 원인
폴란드 공산 정권의 붕괴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논의될 수 있다. 그 첫 번째 요인은 대외 환경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대외 환경의 변화를 초래한 원인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의 적극적 지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 공산권 지역의 지정학적 안보 환경의 변화이다. 

이런 배경하에,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주도한 대내외적 정책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집권하의 소련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소련 내부 사회의 개혁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폴란드와 같은 주변 위성 국가와의 관계도 개혁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폴란드와 같은 공산 정권에 내란이나 소요 사태가 발생해도, 과거처럼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대외정책을 천명하였다. 이런 대외 관계의 변화는 폴란드 내에서 발생한, 자유 노조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정부 활동에 소련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

이와 동시에 주목할 만한 또 다른 변화는 공산주의 경제 체제가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과거 폴란드는 여타 공산국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경제 발전을 이해하고, 운영해왔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국제 경제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였고, 이로 인해 공산권의 경제 체제도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폴란드도 다른 여타 공산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모든 것을 계획하여 운영하는 계획 경제 체제를 채택, 운영해 왔다. 그러나 이런 계획 경제 체제는 타국과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종국에는 국민 삶의 질을 악화시키는 구조적 폐해까지 초래하였다. 

이런 정치 경제적 배경의 변환 속에, 폴란드의 내정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이는 곧 민중 봉기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1970년 12월 발트 해 인근 도시에서 식료품의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는 폴란드가 안고 있던 경제적 모순의 민낯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폴란드는 경제 성장 부진과 그로 인한 실질 임금의 감소, 그리고 주택 공급 부족 등과 같은 구조적 폐해로 몸살을 앓고 있던 상황이었다.2) 

폴란드가 당면한 경제난을 타결하기 위해, 폴란드 공산 정권은 여러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 중 기에레크(Gierek) 정권은 자국의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해외 차입을 통해 조달하고자 했다. 그 결과 1970년대부터 국제 금융 시장에서 차입한 유입금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해외 차입금은  1973년에 4억 3,000만 달러, 75년에 4억 7,500만 달러 그리고 80년에는 7억 3,600만 달러로 늘어났다.3) 

해외 차입을 통한 경제 발전 정책은 단기간에는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해외 차관은 곧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공산당 강경파의 반대였다. 강경파 공산당 지도부는 지나치게 서구에게 의존하는 것은 공산주의 경제를 망가뜨리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즉, 계획 경제, 국영 기업, 물가와 무역에 대한 국가 통제를 통해서만 모두가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마르크시즘(Marxism) 전통 위에 세워진 폴란드가 서구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다면, 결국 자본가의 배만 불리게 된다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 방향은 결국 폴란드 국민의 삶을 더욱 피폐시키기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민주화의 물결과 시련
폴란드 공산 정권의 오판과 그에 따른 경제 실정은 국민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의 침체기를 지나, 1980년대 들어오면서 폴란드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 그단스크(Gdańsk)에서 일하던 여공 안나 발렌티노비츠(Anna Walentynowicz)는 독립 노조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고통 받는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고자 했다. 그러나 발렌티노비츠의 독립 노조 활동은 곧 폴란드 정부에 의해 발각되었고, 그 결과 그녀는 일하던 곳에서 해고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폴란드의 노조 활동은 일단락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본 사건은 노조 활동을 일단락 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전국적 차원의 자유 노조 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1980년 8월부터 시작된 노조 운동은 발렌티노비츠의 복직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장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 삶의 근본적인 개선을 요구하며 노조 운동은 불꽃처럼 전국으로 번져 갔고, 곧 1만 7,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연좌 파업으로 발전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대규모로 진행된 노동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단결’ 또는 ‘연대’라는 뜻의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를 연호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후일 폴란드 노동 사상과 투쟁의 상징적 단어가 되었다.4) 

노조 운동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동시에 국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폴란드 정부는 강온 양면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우선, 1980년 8월 공산당 정부 대표와 노조 대표는 당으로부터 독립한 자유 노조를 인정한다는 그단스크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단스크 협약을 통해, 21개 항목의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면서, 폴란드 노조 활동의 근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노조 활동을 억압하는 강압적인 정책도 구사하였다. 특히 기에레크 정부 이후 들어선 야루젤스키(Jaruzelski) 정부는 노조 활동을 통한 반정부 활동을 공산 정권을 위협하는 주요 요소로 보았다. 처음에는 대화를 통한 노조와의 공존을 모색하였지만, 후일에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 노조 활동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폴란드 정부의 강경 정책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센 반정부 운동을 펼쳤다. 물론 이런 활동이 쉽지만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단스크를 중심으로 한 연대 파업은 다수 자유노조 간부들이 체포로 귀결되었다. 특히 부옉(Wujek) 광산의 시위가 유혈 진압으로 끝난 이후, 반정부 시위는 차차 약화되었다.5)

1982년 10월부터는 자유노조 활동을 금지하였다. 그로 인해 바웬사(Wałęsa)와 같은 노조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5,000여 명의 반체제 지식인이 체포되었고, 노조활동은 결국 지하로 잠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조 탄압에도 불구하고, 바웬사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반정부 투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반정부 투쟁에 대한 지지 성명이 나오면서 그의 반 정부 활동은 더욱 지지를 받게 되었다. 

원탁회의
노조 활동을 탄압하는 강경 일변도의 정책은 계속되지 못했다. 이에 폴란드 공산 정부는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와 원탁회의(Okrągły Stół)를 개최하는 것을 합의하였다. 원탁회의는 1989년 2월 6일부터 그해 4월 4일까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과 자유노조가 참가하였다. 본 회의가 처음부터 순조로이 진행된 것은 아니다. 원래 회의는 1988년 진행되기로 예정이었지만, 1988년 파업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그러나 이런 초기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89년 2월 6일, 체스와프 키슈차크(Czesław Kiszczak) 장관 주재하에 원탁회의가 개최되었다. 자유노조는 원탁회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요구하였고, 이는 폴란드 공산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원탁회의는 폴란드 공식 정부 연립파와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개최된 회의로서, 재야간 정치, 경제 및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을 논의하기 위한 장이 되었다. 본 회의를 통해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계기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야 정치 세력의 현실 정치 참여 기회도 제공되었다. 특히 당시 경제난으로 고통 받고 있던 폴란드 공산 정권은 자유 노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야 세력 측의 경제인들이 제도권 정치로 편입시킬 경우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즉,  만약 이들 자유 노조원들을 원탁회의 대화상대로 참여시킨다면 정국 안정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폴란드 정부는 차후 자신들이 주도한 경제 개혁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이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탁회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기틀을 마련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6)

자유선거
폴란드 공산 정권과 자유 노조 간 개최된 원탁회의 결과로서 1989년 6월 4일과 18일 두 차례에 걸쳐 상하원을 뽑는 자유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통령직, 상원의원직이 신설되었고, 하원 의원의 35%는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누구든 3,000명의 추천을 받으면 피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하원 선거의 경우 집권 공산당인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Polska Zjednoczona Partia Robotnicza, PZPR)이 1위를 차지하였고, 자유노조가 제 2당이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실제 선거에서 단 한 석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하는 참패를 겪었다. 즉, 당시 자유노조는 전체 하원의석의 30%인 135석 전 석을 휩쓸었고, 공산당은 배정의석으로 인해 제 1당이 되었다. 상원의 경우 100석의 위원 중 자유노조가 99석을 독식하였고, 무소속에게만 1석이 돌아갔다. 그 결과 상하원을 합해 공산당과 재야 간의 의석수는 300대 260으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사실 숫자로만 나타난 균형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산당의 입지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7)

이렇게 직접 선거를 통해, 폴란드는 민주주의적인 의회(Sejm)를 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1989년 6월 4일 치러진 폴란드 역사상 첫 민주주의적인 선거에서,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 노조가 압도적인 승리를 차지하여 의회의 대부분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마침내 종식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드디어 민주정인 폴란드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로서 1980년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은 드디어 결실을 보았고, 공산 정부의 종언으로 인해, 폴란드에서뿐만 아니라, 국제 정치사에서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 각주
1) David S. Mason (1988) Glasnost, Perestroika and Eastern Europe, International Affairs, Vol. 64, No. 3, pp. 431-448  
2) 김종석, 김용덕 (2020) 폴란드 공산주의 체제 붕괴 연구: 1980년대 체재 위기를 가져온 원인을 중심으로,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55권, pp 292-296.
3) ILiana Zloch-Christy (1987), Debt Problems of Eastern Europ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39.
4) Susan C. Pearce (2009) “The Polish Solidarity Movement in Retrospect: In Search of a Mnemonic Mirror”, International journal of Politics, Culture, Society, Vol. 22, No. 2, p. 159.
5) 김종석 (2006), 폴란드 민족 운동사와 저항정신(Ⅱ) -1980년대를 중심으로, 『동유럽연구』, 17권, p. 206.
6) 김용덕 (2020) “공산 정권과 자유노조의 대화로 이룬 폴란드 체제 전환 연구”, 『EU 연구』, 제 55호, pp. 356-359
7) 김종석 (2006), op. cit.,  pp. 20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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