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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20세기 체코슬로바키아와 한국

체코 양준석 한국외국어대학교 체코·슬로바키아어과 객원교수 2021/06/29

들어가는 말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한국에서 동유럽에 대한 인식은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기존의 인식에서 크게 전환되었지만, 여전히 체코·슬로바키아(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독립)는 먼 동유럽국가라는 인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를 회원국으로 하는 중부유럽 4개국의 모임인 비셰그라드 그룹(V4, Višegrádská skupina)은 2019년 한국의 대EU 수출에서 약 20%를 차지하는 EU 내 최대 수출시장이다. 투자의 경우 2020년 기준 지난 5년간 V4 국가들에 대한 한국기업들의 투자액은 30배 가까이 증가하여(4개국 누적 약 80억 달러, 한화 약 9조 520억 원, 2019기준) V4 국가들은 EU 내 최대 한국의 투자처가 되었다(외교부 2020.06.11). V4의 핵심국가인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활발하게 한국과 경제교류를 유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아름다운 세계적 도시 프라하를 제외하고는 이 국가들에 대해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체코슬로바키아와 한국은 분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존재는 한국에 있어서 독립의 롤모델 역할을 했고, 냉전기 한국은 공산화된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정부 수준의 교류책과 민간에서의 다양한 관심을 유지했다. 유라시아의 양극단에 위치한 지정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과 자유를 목표로 끊임없이 교류하고 지지하는 관계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이상적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한국인들 인식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약 5만여 명으로 구성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1차 대전 참전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러시아 볼셰비키와 전투하며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여정에 올랐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서 군단의 가이다(Radola Gaida) 장군은 여운형(呂運亨) 등 한국 인 정치 지도자들과 관계를 나누었다. 가이다 장군은 한국인들에게 “귀국의 독립선언은 역사상 드문 용기와 애국심을 보인 것입니다. 세계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고 칭찬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은 우리 체코 국민”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횡단 시 보유했던 무기를 한국 독립군에게 낮은 금액으로 넘겼다. 북로군정서 등의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게 화폐 외에도 비녀, 금반지, 비단보자기 등으로 비용을 충당하며 무기를 구입했다. 이 무기는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 등에서 독립군의 주력 무기로 사용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한국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우했다는 사실보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체코슬로바키아가 더욱 주목을 끌었던 점은 파리강화회담의 결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내용은 3.1절을 기점으로 언론과 독립단체들의 포고문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알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에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현실적 가능성이었고, 독립의 실제적 모델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인들도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마사릭(Tomáš Garrigue Masaryk)이 중부유럽의 독립을 선언했던 미국 필라델피아 독립관(Independence Hall)과 같은 장소에서 1919년 4월 독립을 위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윤치호(尹致昊), 조병옥(趙炳玉), 백낙준(白樂濬) 등 한국 지식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모델 삼아 민족의 독립은 실력양성과 국제정세의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윤치호는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350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억압을 받아오면서 1) 음악 2) 건강 3) 단결에 전력”했으며, “정신적인 면에서나, 물질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나 철저하게 준비”(윤치호 일기 1920.9.17)했다고 독립의 이유를 분석했다. 또한 조병옥도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가 국제적 변동에 따라 자주독립을 얻게 된 예를 상기할 때 우리 민족도 반드시 자주독립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폴란드와 같은 경우의 그러한 국제적 변동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한줄기의 희망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선망의 인식은 계속 유지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서로의 독립 의지를 공유하며 지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적대관계로 전환
스탈린의 분신과도 같았던 고트발트(Klement Gottwald)가 지배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샬플랜(Marshall Plan) 참여는 1947년 7월 최종적으로 무산되었고, 1948년 2월혁명 이후 공산 독재체제가 완성되며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전적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 한국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인식은 이전의 약소독립국으로서의 동류의식에서 이념적 이질의식으로 선회하며 소련의 공산위성국이라는 적대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냉전기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관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중립국감시위원단(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의 참여라 할 수 있다. 1992년 발간된 외무부 집무자료집의 한-체코슬로바키아 관계 연혁의 가장 처음 시점을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일원으로 한반도 휴전협정체제 유지 활동’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가 양국에게 좋은 기억이 될 수는 없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에 따라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중립국감시위원단을 구성하여 한국과 북한에 대한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을 한국으로 들여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국가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중립국감시위원단 참여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폐지를 주장했고, 1954년 ‘한국을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기존의 많은 평가에서 중립국감시위원단 활동의 중단 책임이 한국과 북한의 공동 책임이며, 중립국감시위원단 반대 시위가 한국정부 주도의 ‘관제데모’로 진행되었음이 지적되었다. 하지만 정전협정에 약속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임무 내용과 다르게 체코슬로바키아는 한반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동지’라는 입장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사명이 아니라 전투적인 역할’을 수행하려 했고, 1952년 4월부터 육군 380명으로 구성된 특수군은 훈련을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스웨덴과 스위스와는 달리 평화유지의 사명이 아니라 전투를 위한 사명에 따라 무기를 소지하고 한국에 입국할 계획을 구상했고, 최종 입국 직전 무장을 해제했다는 사실이 가브리엘 욘슨(Gabriel Jonsson)의 2013년 연구에서 밝혀졌다. 또한 폴란드 요원은 기밀기관 정보요원이었으며, 대부분 CIA에 대한 방첩활동, 중립국위원단의 친북적 활동으로 인해 북한군이 대폭 증강되었다고 하는 내용도 폴란드 학자 마렉 한데렉(Marek Hańderek)의 연구 결과에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다. 미국 국무부의 외교자료(FRUS) 기록에도 스위스와 스웨덴 감시단은 북한 지역에서의 감시단 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유엔에 보고했고, 그 이유로 체코슬로바키아 위원단의 감시임무 방해를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의 공산 중립국감시위원단에 대한 반대 시위를 강하게 억압하는 것과 감시위원단 활동을 종결시키는 것, 둘 사이에서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산 감시위원단에 대한 반대시위가 전국적 단위에서 진행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1955년 8월 6일부터 공산 감시위원단 ‘축출국민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며 9일에는 95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지역별 시위참가자는 서울 2만 6,100명, 경기 2만 1,059명, 강원 2만 3,941명, 충북 2만 5,000명, 충남 15만 3,500명, 경북 20만 4,800명, 경남 33만 500명, 전북 15만 7,360명, 제주도 1만 2,880명 이었다. 사상사는 사망 1명, 중경상 314명이 발생했을 정도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경향신문 1955.8.12). 특히 미국은 “대한민국과의 심각한 갈등에 직면할 것이다. 폴란드와 체코가 철수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서 폭력적인 행위로 분출될 수 있고, 그 행위가 발생하면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인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공산주의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결코 옹호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United States Objectives and Courses of Action with Respect to Korea, Period of Report” 16 Mar 54–17 Nov 54, FRUS)”라며 당시 한국에서의 전국적이고 격렬한 시위의 양상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이를 통해 공산 중립국감시위원단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위의 자발적 성격을 고려할 수 있고, 반공과 반미를 외친 공산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운동을 정부의 ‘관제데모’라 하는 것은 일부의 특징을 묘사한 것이라 파악할 수 있다.

냉전기 관계 회복의 시도
냉각된 한국-동유럽 관계는 1960년대 점차 개선되고 있었는데, 1965년 유고슬라비아는 국제PEN대회에 참가하는 한국 대표들에게 입국을 허가했고, 1966년 모스크바 국제해양학총회에 한국정부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한국 외무부는 1966년 정보문화국에 공산권 지역의 외교정책을 담당하는 특수지역과 신설을 발표했다. 동유럽에 대한 새로운 지역인식은 동유럽담당조직 개편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동되게 되었다. 1974년 9월 19일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을 담당하는 구아국(欧阿局) 산하 구주과(歐洲課)는 구주1과와 2과로 분화하여 구주2과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포함하는 동유럽을 담당하게 되었고, ‘동유럽’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동유럽 전담부서가 구체화되었다. 1978년 4월 3일 동유럽에 대한 외교조직의 변천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되어가는 지역 인식이 명확히 조직구성에 투영되어, ‘동구’ 용어가 조직명에 구체적·독립적으로 투영, 동구담당관이 출범하였다. 동구담당관은 동독 및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등에 대한 정책을 담당했다. 

동구담당관 창설 배경에는 1970년대 양 지역의 정치·경제적 변화가 주요했다. 첫째, 정치환경 측면에서 데탕트와 함께 경직된 남북관계를 완화하려는 시도가 진행됐다. 1973년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대통령 특별선언’에서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하며, 정부는 동유럽 접촉을 강화했다. 관계개선 전략으로 공산권 인사의 방한을 추진하고, 공산권 주최 국제회의 박람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공산권 외교의 변화에 대해, 1965년 한국국제관계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과 공산권 관계 변화에 기여한 최종기(崔鍾起)는 ‘소련·동구권에 대해 담을 쌓아온 한국외교의 일대전환’으로 평가했다. 둘째, 통상환경의 변화로서 한국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되는 시기 수출시장 다변화를 위한 공산국가와의 실리외교를 모색했고, 1971년부터는 동유럽에 대한 통상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수출통계가 1971년부터 집계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수출은 1975년부터 집계되었다. 1972년 미국 국무부는 한국정부가 제3국을 통한 동유럽국가들과의 간접 통상에서 직접 무역으로 무역방식을 전환하고 있음에 주목하며, 한국정부가 통상의 활성화를 통해 정치적 우호관계 성립을 기대하고 있다고 파악했다(“ROK Governmental Organization for and Prospects for Trade with Communist Countries" September 27, 1971. RG 59).

냉전기 한국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시기뿐만 아니라 1977년 체코슬로바키아의 77헌장(Charta 77) 발표와 반체제운동은 한국언론에 의해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됐다. 당시 한국정부의 공식 입장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1977년 1월 초부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소련, 미국, 유럽국가들이 서명한 헬싱키협정에 따른 인권보호 준수를 요청하며 77헌장이 발표되고 반체제 인사들이 구속되는 상황들이 한국에 보도되었다. 1~2월 사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폴란드, 헝가리, 동독의 반체제 인사들의 탄압 상황, 동독의 인권운동 확산을 대비한 비상경계령 발표, 서독, 미국, 영국의 77헌장 지지 발표 등이 긴박하게 보도되었다. 이례적인 사항은 당시 공산진영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의 77헌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비록 정치·경제적 측면처럼 정부적 수준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반체제운동에 대한 지지표명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민간의 영역에서 한국인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를 위한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지지를 보냈던 것으로 파악된다. 

냉전 해체 이후 동유럽에서 중부유럽으로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반의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한반도에 ‘North Korea’만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한국 이미지의 일대전환 사건이었다. 1988년 체코슬로바키아 올림픽 준비부장은 한국의 올림픽 준비 상황을 확인하고 찬탄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과 긴밀하고 튼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북한 입장을 무시하면서 한국과 관계개선을 추진할 수는 없는 상황’임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한국에 대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새로운 동경의 나라로 떠오르고 있다’는 인상이 확산되고 있음을 당시 한국 언론은 보도했다(매일경제신문 1992.11.17).

1990년 3월 22일 드디어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본격 적인 국가수준의 교류가 시작됐다. 경제적 측면에서 냉전체제 해체의 국제적 상황에 따라 한국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무역 교류는 급격히 증대되었다. 1992년 하벨(Václav Havel) 대통령이 방한하여 노태우(盧泰愚) 前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노태우 대통령은 “하벨 대통령의 지도력이 중동부 유럽의 개혁과 민주화를 촉진하고 유럽에서의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 시기 확대회담에서 여려 경제협력이 논의되었는데, 하벨 대통령은 진행 중인 체코슬로바키아 내 삼성의 냉장고 제조사업을 비롯한 오리온 및 럭키금성의 합작사업을 언급하여 향후 많은 분야에서 한국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희망했다. 이러한 1990년대 합작 추진은 결국 2000년대 본격적인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삼성전자의 합작 공장 건설의 초석이었다. 

이러한 급속히 가까워지는 양 지역관계를 통해 1994년 4월 외무부직제 시행령으로 구주국 산하 서구1, 2과, 동구과, 중구과 신설되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중구과에 포함되었다. 1978년 동구담당관이 신설된 이래 동유럽지역을 가리키던 동구는 구소련연방과 중앙아시아를 가리키게 되었고, 과거의 동유럽 개념은 중부유럽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용어 전환이 갖는 의미는 동유럽,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소련의 위성국이라는 적대적 인식에서 과거 일제강점기 독립을 향해 의지를 공유하던 인식으로 회복되며 양국관계 회복의 새로운 시작점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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