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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파푸아 특별자치법 개정: 법의 문제가 아닌 실천의 문제

인도네시아 이지혁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 2021/10/07

한국 사람들이 한반도를 묘사할 때 흔히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동서의 길이가 5,120㎞나 되는 자신들의 군도 국가를 지칭할 때 흔히 ‘다리 사방 삼파이 메라우케(dari Sabang sampai Merauk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사방(Sabang)’에서부터 ‘메라우케(Merauke)’까지라는 의미다. 사방은 인도네시아의 가장 서북쪽에 있는 반다 아체(Banda Ache)에서 17km 떨어진 웨섬(Pulau We)에 있는 작은 도시다. 반대로 메라우케는 파푸아의 가장 남동쪽에 있는 작은 도시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국토는 한라에서부터 백두까지인 것처럼, 인도네시아인들의 조국은 사방에서부터 메라우케까지이다. 대다수 인도네시아인이 ‘하나의 인도네시아(Satu Indonesia)’가 되기를 바라는 것과 달리, 여전히 종족, 언어, 종교, 역사적 경험의 차이로 분리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휴화산처럼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분리독립을 원하는 세력들이 있다. 최근에 휴화산에서 미약하지만 활화산으로 변모하고 있는 곳이 파푸아 지역이다. 파푸아에서는 수십 년 동안 독립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2021년 7월에 인도네시아 국회는 파푸아 특별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자치법을 다시 20년 연장하는 동시에 파푸아가 인도네시아의 통치권 아래에 있음을 명확히 하였다. 내무부 장관 티토 카르나비안(Tito Karnavian)은 국회에서 “개정된 법안이 파푸아의 발전을 가속화하고 번영을 가져다 주기를 바란다” 면서, 덧붙여 "개정된 법은 이 지역에 특별자치기금을 활성화하고, 파푸아 원주민들이 로컬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며, 의료와 교육을 활성화하고, 천연자원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이 (파푸아에) 더 많이 배분되게 할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은 개정안의 통과가 “인종주의적 식민 지배의 연장”에 불과하고 “민주적인 해결책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파푸아인에게 자결권을 결정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Costa and Lamb 2021).

갈등의 원인: 선택이 상실된 자유선택행동(the act of free choice) 
파푸아의 분리독립 운동의 발단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파푸아를 지칭하는 용어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령 파푸아(Papua)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식민지배 시기부터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주권을 이양한 때인 1962년까지는 ‘네덜란드령 뉴기니(Netherlands New Guinea)’, 1962~1963년까지는 ‘서뉴기니(West New Guinea)’, 1963~1973년까지는 ‘서이리안(Irian Barat, West Irian)’, 1973~2002년까지는 ‘이리안자야(Irian Jaya)’, 그리고 2002년부터 현재까지는 ‘파푸아(Papua)’라고 불리고 있다. 한편 분리독립을 원하는 원주민들은 파푸아를 ‘서파푸아’라고 부르는데, 현재 서파푸아는 파푸아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주-파푸아주, 서파푸아주- 중에 서쪽 주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림 1> 인도네시아 지도
* 자료: Google Map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를 반으로 나눠 동부는 파푸아뉴기니이고 서부는 인도네시아령 파푸아이다. 서구 식민지배의 결과물로 하나의 섬이 두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서쪽의 절반은 네덜란드(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의해, 동쪽의 절반은 영국(영국령 퀸즐랜드)과 독일(독일령 뉴기니)에 의해 분할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재식민지배를 위해 돌아온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가 4년간의 독립전쟁을 치른 후 1949년 네덜란드령 뉴기니(파푸아)를 제외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이 인도네시아로 독립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1962년까지 파푸아를 지배하였지만, 사실상 1952년부터 파푸아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독립 준비를 허락하였다. 네덜란드의 이와 같은 행보는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인도네시아와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파푸아 주민들도 인도네시아와의 통합에 찬성하는 측과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대치는 양쪽 진영(인도네시아, 통합찬성-네덜란드, 분리독립)의 물리적 충돌(1961~1962년)로 이어졌고, 1963년 인도네시아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의 중재로 양국이 뉴욕 협정(New York Agreement)을 체결하였다. 파푸아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6년 동안의 인도네시아 지배와 파푸아의 독립 여부를 결정할 국민투표 시행을 조건으로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가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1969년까지 파푸아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투표-자유선택행동(the act of free choice)-를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파푸아에 대한 지배권이 인도네시아에 양도되었다. 

자유선택행동에 대한 해석은 오랜 시간 통합을 찬성하는 측과 분리독립을 원하는 세력 사이에서 논란의 소지가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선거에 모든 파푸아 주민이 참석한 것이 아니라 일부 선택된 대표만이 참가하였다는 것이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측의 설명에 따르면 1969년 진행된 투표(Act of Free Choice)는 유엔(UN)의 묵인하에 당초 협정에서 명시한 성인 남녀 전부(약 80만 명으로 추정)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선발한 주민대표 1,022명 만이 참여했다. 선발된 사람들은 협박에 시달리며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원한다’는 선택을 강요당했고 파푸아는 공식적인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요컨대 이 투표가 불법적이고, 비민주적이고, 자유선택행동은 ‘선택권을 주지 않은 행동(the act of no choice)’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인도네시아 정부와 통합을 찬성하는 측은 투표는 유엔, 미국, 소련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감독하에서 치러진 것임으로 대표성이 있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항변한다. 또한 당시 소통의 어려움, 열악한 교통, 언어적 장벽, 높은 문맹률, 낙후성 등으로 정상적인 투표를 치르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표자를 선발하여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특별자치법 제정과 개정: 법 자체보다는 법 실천의 문제
파푸아는 2001년 파푸아 지방 특별자치에 관한 법률 2001-21호에 의해 특별자치지역으로 승인되었다. 소위 특별자치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이 물러나고 정권을 이어받은 바하루딘 유수프 하비비(Bacharuddin Yusuf Habibie) 정권에서 제정되었으며, 2001년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oekarnoputri) 대통령 시절에 발효되었다. 수하르토의 권위주의 시대가 끝나고 하비비 대통령이 취임하고 막 개혁이 시작될 무렵 대통령과 파푸아의 지도자로 구성된 ‘Team 100’은 파푸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남을 가졌다(1999년 2월 26일). 이 만남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아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수하르토의 강경 노선과는 다른 자치 모델을 도입하였다. 

사실 개혁 시기 동안 정치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에 집중되었던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때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지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자치, 연방, 분리독립-이 개진되었다. 이 중 연방과 독립은 불편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배제되었는데, 특히 분리독립은 동티모르에 대한 쓰라린 기억으로 인해 더욱 그러했다. 분명한 원칙과 정책의 일관성이 부족했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아인들이 직접 특별자치법의 초안을 만드는 데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자치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법안은 네 가지 범주 혹은 원칙으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는 지방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고, 둘째는 파푸아 원주민들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셋째는 원주민들의 광범위한 정치 참여를 허락하는 것이고, 넷째는 예외 및 차별 없이 인권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통과된 법안은 초안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27개의 장과 79개의 절로 구성된 특별자치법은 파푸아인들이 주장하는 원칙과 요구사항을 대부분 수용하였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파푸아인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인센티브가 될 수 있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초안에 포함되었던 내용 중 약간이라도 독립과 관련될 수 있는 내용은 모두 삭제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특별자치법이 파푸아의 주요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안이라고 믿었고, 2001년 10월 인도네시아 국회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문제는 특별자치법 제정보다는 실천이다. 전문가들은 자치법 제정이 절충안이기는 하지만 이 법이 제대로 실행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불만의 요소 중 상당 부분이 누그러졌을 것이라고 말한다(Bertrand 2004). 기대했던 법 집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2001년 11월에는 인도네시아의 특수부대인 ‘코파수스(Kopassus)’에 의해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테이스  엘루아이(Theys Eluay)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3년부터 인도네시아의 통치가 시작된 이래 최소 10만 명 이상의 파푸아인들이 살해당했고, 빈번하게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또한 살인, 강간, 고문, 불법적인 체포와 구금, 집회 및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 그리고 비정부기구, 인권단체, 국제 감시 기구 등의 자유로운 접근이 금지되었다. 무엇보다 인도네시아인들의 파푸아인들을 대하는 인종 차별적 태도가 파푸아와 파푸아 외의 다른 인도네시아와의 갈등 구조를 영속적으로 만들고 있다.  

최근 파푸아인들의 감정을 격하게 동요케 했던 사건으로 2019년 경찰의 파푸아 학생 기숙사 급습이 있다. 수라바야(Surabaya)에서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인 8월 17일 하루 전날에 국기가 훼손되어 하수구에 버려진 일이 있었는데, 국기를 훼손한 학생이 파푸아 학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로 들어갔다는 다수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무장한 경찰이 기숙사 문을 부수고 학생 47명을 체포하는 일이 발생했다. 무장한 경찰이 학생들을 기숙사에서 체포했다는 것도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체포에 가담한 경찰이 파푸아 학생들을 ‘원숭이’와 ‘개’라고 부르는 영상이 유포되면서 파푸아인들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했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반인권적인 폭행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투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현재 파푸아는 인도네시아 전체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빈곤율도 높고 인간개발지수(HDI)도 인도네시아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사실 만연한 부정부패, 중앙정부와 결탁한 현지 엘리트, 특별자치기금의 오남용 등 파푸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의 상당 부분은 파푸아 자체에서 기인한 측면도 크다. 조코 위도도(Joko Widodo) 대통령 취임 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아에서 대규모 인프라 사업을 진행했고 경제 발전을 위한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 조코위 대통령은 지금까지 파푸아를 13번이나 방문했고 도시와 시골 지역의 연료 가격의 큰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파푸아 전역에서 ‘동일한 연료 가격 정책(One Fuel Price Policy)’을 시행했으며, 특별자치기금과는 별도로 ‘마을 기금(Village Fund Scheme, Dana Desa)’을 조성하여 도시와 시골 지역의 발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노력의 결과로 조코위 대통령은 2019년 대선 때 파푸아주와 서파푸아주에서 각각 90.6%, 79.8%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인권과 관련된 문제는 높은 기대와 달리 조코위 정권에서도 큰 진전이 없다(Ruhyanto 2021).

2001년에 제정되었던 법률 2001-21호(특별자치법)는 20년 동안만 유효하므로 오는 11월에는 만료된다. 따라서 조코위 대통령은 2020년 12월에 법률 연장 및 개정에 대한 신청서를 국회에 제출했고 7개월 만인 2021년 7월에 국회가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개정된 법안은 2041년까지 유효하게 되었다. 개정된 법안은 18개 장이 수정되었고 2개의 장이 추가되었으며 특별자치 시행을 감독하는 특별기관(BK-P3, Badan Khusus Percepatan Pembangunan Papua)의 설립을 명시했다. 특별자치기금도 20년 동안 연장될 뿐만 아니라 기금의 규모가 일반할당기금1)의 2%에서 2.25%로 증액되었다. 

개정안 통과와 관련해서 서파푸아주와 파푸아주 주지사는 국회에 대한 감사와 환영을 뜻을 밝혔다. 파푸아 국회도 법안의 개정을 환영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내비쳤다. 다른 한편에서는 법안 통과 하루 전날부터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통과 하루 전날에는 자야뿌라(Jayapura)에서 법안에 반대하는 학생 23명이 체포되었고, 통과 당일에는 자카르타와 서파푸아에서 각각 40명, 18명의 시위자가 체포되었다. 시위자들은 개정안이 현지의 요구는 무시하고 자원이 풍부한 파푸아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력만 강화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사방(Sabang)에서 메라우케(Merauke)까지 포용하는 다양성의 필요
많은 인도네시아인은 동티모르 상실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쟁취한 입장에서는 분리독립이지만 이를 수용해야 하는 측에서는 상실인 것이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티모르보다 규모 면에서나 자원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섬인 (서)파푸아의 독립을 허락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독립이 요원한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타협안은 특별자치법을 법안 그대로 잘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조코위 대통령은 수도 이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자바만의 인도네시아가 아닌 모두를 위한 인도네시아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인도네시아의 국가 모토인 ‘다양성 속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 Bhineeka Tunggal Ika)’이 수사로만 그치고 현실에서 수용 가능한 다양성과 관용의 범위가 축소되는 것이 자주 목격된다. 주민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고 인종적으로도 다르고 문명의 발달 정도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는 파푸아의 온전한 자치를 허용하고 이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다양성이다. 2001년에 제정된 특별자치법안은 만료를 앞두고 있고 이미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새로운 법안은 ‘개정’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 개정안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이 법이 ‘자카르타를 위해 자카르타에서 만들어진 법(made in Jakarta, made by Jakarta, made for Jakarta)’이 된다면 새로운 20년은 지난 20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다양성의 범위가 사방에서부터 메라우케까지를 다 포용할 수 있어야 자발적인 통일성이 생겨날 것이다. 



* 각주
1) 인도네시아 전체 34개 주에 할당되는 기금의 2.25%가 파푸아의 특별자치기금으로 배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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