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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1970년대 이래 멕시코와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득세와 범죄의 세계화

멕시코 / 콜롬비아 박구병 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2023/09/16

서론

2023년 1월 5일 시날로아(Sinaloa) 카르텔의 악명 높은 두목 호아킨 ‘엘 차포’ 구스만(Joaquin ‘El Chapo’ Guzmán)의 아들 오비디오 구스만(Ovidio Guzmán)이 멕시코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체포 과정의 총격전에서 경찰을 포함해 최소 29명이 사망했고, 1월 9일 미국으로의 범죄인 인도 절차가 멕시코의 연방 판사에 의해 중단되었다는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결국 오비디오 구스만은 2023년 9월 15일에 미국으로 인도되어 곧 미국의 법정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법무장관 메릭 갈런드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오비디오 구스만의 범죄인 인도는 시날로아 카르텔이 오랫동안 주도해온 마약 밀거래 활동에 단호히 대처하고 공세를 퍼부으려는 미국 정부의 최종적 결실이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2020년 5월부터 2021년 4월까지 불과 1년의 기간 동안 약물 과다 복용 사망자가 처음으로 10만 명을 넘어섰고(1999년부터 2021년까지 22년간 약 100만 명 사망,) 그중 80%가 펜타닐(fentanyl) 관련 사망자였다. 펜타닐은 2020년과 2021년에 교통사고와 총기사고를 제치고(코로나 19 감염 제외) 미국인의 사망 요인 1위에 등극했다. 펜타닐은 1959년 벨기에 의사 폴 아드리안 얀 얀센(Paul Adriaan Jan Janssen)이 개발한 외과 수술용 마약성 진통제로, 모르핀의 100배에 해당하는 효과를 지닌다고 알려졌다1). 따라서 펜타닐은 병원 수술실이나 몸집이 큰 동물에 투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극미량을 복용해도 치사량으로 간주될 정도라고 한다. 펜타닐은 통증의 전달을 억제함으로써 암 환자를 비롯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효과적일 수 있으나 일반인들이 복용할 경우 불안 증세, 호흡 저하, 저혈압, 중독, 혼수상태 등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 
  
더욱이 최근의 자극적인 소식에 따르면, 펜타닐의 상당량이 시날로아 카르텔과 더불어 할리스코 신세대 카르텔(CJNG)2)에 의해 미국으로 유입되고 있다. 두 카르텔은 중국으로부터 넘어온 전구물질(precursor chemicals), 즉 화학 원료를 활용해 멕시코 내 비밀 공장에서 펜타닐을 대량 제조한 뒤 미국으로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2021년 미국 마약단속국(DEA)의 공중 보건 경고에 따르면 가짜 처방전을 통해 펜타닐이 함유된 약이 미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으며 이런 사정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갈등을 빚는 또 다른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최대 마약 소비국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 
원래 진통ㆍ각성제의 원료는 이른바 ‘골든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 황금의 삼각형)’이라고 알려진 미얀마, 태국, 라오스, 그리고 ‘골든크레센트(Golden Crescent, 황금의 초승달)’라고 불린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 등지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2015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의 약 66%를 생산했고 2016년에도 약 448톤의 헤로인을 제조했다고 한다. 이렇듯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양귀비를 원료로 하는 아편과 헤로인이 튀르키예를 거쳐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항구로 유입되었고 뒤이어 미국으로까지 흘러들었는데, 이른바 ‘프렌치 커넥션’으로 알려진 이런 흐름은 대략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이는 미국 마약 단속관들의 활동으로 1970년대 초에 사실상 와해되었다. 그러자 멕시코의 국경 도시들이 일시적으로 미국 헤로인 시장의 4분의 3을 떠맡기도 했다. 멕시코 시날로아의 시에라마드레 산악 지대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아편 양귀비(opium poppies)가 재배되었고 1950년대부터 그 지역의 경작자들은 단지 양귀비 재배업자(gomero)가 아니라 사실상 국제적인 마약 밀매업자가 되었다.  
  
한편 미국인들의 마약성 진통제나 기호용 마약 소비가 급증하자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전(前)대통령은 1971년 6월에 마약을 ‘공공의 적 1호’로 지칭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을 선포했고, 1973년 7월에는 마약단속국이 창설되었다. 1976년 마약 단속국은 약 1만 명의 멕시코 군인과 경찰을 지원하는 작 전을 전개했는데, 이 작전은 미국이 후원하는 첫 번째 제초제 분무ㆍ살포 작전으로 향후 콜롬비아,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여러 곳에서 복제된 전술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마약 밀매업자(narcotraficante, el narco)들은 공백을 메울 새로운 공급처, 일꾼을 갖추고 상대적으로 공권력이 미약한 국가를 찾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로 콜롬비아였다. 그 뒤 콜롬비아는 멕시코와 더불어 국제 마약 거래의 양대 산맥으로 부상했다. 미국 마약단속국의 멕시코 작전을 계기로 새로운 대체지가 된 콜롬비아는 197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 코카인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코카인 제조와 밀수출의 중추로 자리매김했다3).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 vs. 레이건 행정부, ‘마약과의 전쟁’
이런 국면에서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milio Escobar Gaviria, 1949~1993)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약 15년간 메데인(Medellin) 카르텔의 ‘마약왕’으로 군림했다.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해안으로부터 미국의 플로리다까지 약 1,450km(900마일)의 카리브 해상 경로를 통해 코카인을 실어 나르거나 카리브 해 바하마 군도의 한 섬을 사서 1km에 달하는 활주로를 건설하고 그곳을 코카인 운송의 거점으로 삼았다. 대형 수송기에 싣고 온 코카인을 바하마에서 경비행기들에 나눠 실었고 그 경비행기들이 미국에 입국하거나 플로리다 해안에서 가까운 어떤 지점에 자루를 떨어뜨려 놓으면 보트를 타고 수거하는 방식을 취했다고도 한다. 이런 식으로 한 달에 약 70~80톤의 코카인을 운송해 메데인 카르텔은 1980년대 미국 코카인 시장의 80%를 장악했으며 하루 최대 6,000만 달러(한화 약 792억 원), 연간 최대 40억 달러(한화 약 5조 2,825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고 추정된다. 1987년 당시 <포브스(Forbes)>가 추산한 에스코바르의 현금 유동성은 30억 달러(한화 약 3조 9,619억 원), 순자산은 20억 달러(한화 약 2조 6,412억 원)였다. 
  
‘은 또는 납(plata o plomo)4)’으로 대변되는 에스코바르의 세력 확장 방식에서 잘 드러나듯, 마약 밀매업자들은 연구자들이 표현하는 용어 ‘마약 거래 조직(DTO, Drug Trafficking Organization)’을 훌쩍 뛰어넘어 준군사적인 범죄 집단(criminal paramilitary complex)으로 빠르게 변모했다5). 1981년 7월 6일 발간된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주목하듯, ‘미국을 대표하는 마약(all-American drug)’이 된 코카인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는 1982년 ‘마약과의 전쟁’ 선포를 넘어 마약 문제를 국제정치적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한 마약 정책의 핵심은 ‘군사화’와 ‘공급 축소’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군대를 동원해 안데스 산악 지대 마약 생산지의 재배 단계부터 싹을 자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박과 항공기를 투입해 순찰을 강화하며 플로리다에 이르는 밀매매 통로를 차단하자 주된 밀매매의 무대는 멕시코-미국의 국경으로 이동했고 마약 밀거래 관련 범죄의 국제화는 또 다른 국면으로 치달았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득세와 확산
그 무렵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위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역사를 바꿔놓은 한 인물이 부상하는데, 그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역사에서 ‘보스 중의 보스(jefe de jefes)’로 알려진 미겔 앙헬 펠릭스(Miguel Ángel Félix Gallardo)였다. 시날로아 주지사 가족의 경호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지인의 소개로 마약 거래에 손을 댄 펠릭스는 사실상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대부였다고 볼 수 있다. 연방 사법 경찰(policía judicial federal) 출신이었던 펠릭스가 조직적으로 마약 밀거래 활동에 나서기 전까지 멕시코의 마약 사업에서 코카인의 비중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는 미국의 마약 수요와 콜롬비아의 상황 변화를 간파하고 멕시코의 마약 유통업자들을 규합한 뒤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과 적극적으로 연계했다. 
  
그리하여 콜롬비아인이 생산하고 멕시코인이 실어 나르고 미국인이 흡입하는 코카인의 이동 경로가 확립되었다. 1980년대 당시 미국에서 소비된 코카인의 60%가 멕시코를 통해 유입될 정도였다. 하지만 1985년 미국 마약단속국 요원의 피살을 계기로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레이건 행정부의 응징이 강화되면서 펠릭스는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가 통제하던 과달라하라 카르텔은 여러 조직으로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할 승계는 21세기에 더욱 발호하게 되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본격적인 확산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펠릭스의 운전기사로 활동한 바 있는 호아킨 ‘엘 차포’ 구스만은 시날로아 카르텔의 두목이 되었고, <포브스>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약 10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했다. 구스만은 1993년에 수감된 뒤 2001년 1월 말 과달라하라의 일급 보안 교도소를 탈출했고, 2014년 2월에 수감된 뒤 2015년에는 멕시코주 알티플라노 일급 보안 교도소를 탈출하는 등 극적인 이력을 쌓기도 했다.

탈옥의 성공은 교도관 매수와 뇌물 제공의 결과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널리 퍼진 음모론에 따르면 70년이 넘는 멕시코 제도혁명당(PRI)의 연속 집권을 종식시키고 2000년 12월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룬 국민행동당(PAN) 출신의 비센테 폭스(Vicente Fox) 대통령이 시날로아 카르텔의 후원자였다. 또한 폭스는 1980년대에 미겔 앙헬 펠릭스가 그랬듯이 쇄신된 시날로아 카르텔을 가장 강력한 조직으로, 구스만을 전국적인 대부로 만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런 소문과 음모론은 2000년대 멕시코의 대통령들을 괴롭혀 왔지만, 구스만과 시날로아 카르텔이 폭스나 후임인 펠리페 칼데론(Felipe Calderón)과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는 그리 뚜렷하지 않다.

결국 호아킨 ‘엘 차포’ 구스만은 2016년 멕시코 해병대에 의해 체포된 뒤 2017년 1월 범죄인 인도 절차를 통해 미국으로 넘겨졌다. 마약 밀매, 돈 세탁, 살인 등 10가지 혐의로 기소된 구스만은 2018년 11월부터 ‘세기의 재판’에 임했고 2019년 2월에 배심원단의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미국 연방 법원은 구스만에게 가석방 없는 종신형(종신형+30년 형)과 추징금 126억 달러(한화 약 16조 6,338억 원)를 선고했고, 구스만은 2019년 7월부터 미국 콜로라도 플로렌스의 ADX(일명 ‘수퍼맥스 supermax’ 또는 ‘사막의 알카트라즈’)에 수감되었다. 세계 최고 보안 등급 교도소인 이곳에는 2023년 6월에 사망한 연쇄 소포 폭탄 테러범(unabomber) 테드 카친스키(Ted Kaczynski)를 비롯해 여러 문제적 범죄자들이 갇혀 있다. 
  
멕시코의 뒤늦은 ‘마약과의 전쟁’ 
멕시코의 역할은 코카인 운송의 중개지에만 그치지 않았다. 1990년대 말부터 멕시코인들의 헤로인과 코카인 소비도 점차 늘어났다. 이에 따라 멕시코에서도 2006년 12월부터 ‘마약과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멕시코 곳곳에 훈련 캠프를 마련한 마약 카르텔의 무장 조직원들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2,500명이 넘는 공무원들을 살해했는데 그중에는 2,200명의 경찰관, 200명의 군인, 판사, 연방 관리뿐 아니라 시장, 주지사 후보자, 변호사 등이 포함되었다. 멕시코의 일부 관리들은 잔혹한 테러 행위들을 일컬어 관광객들의 행선지를 칸쿤에서 플로리다로 바꾸도록 유도하려는 ‘그링고(gringo, 미국인)’의 음모라고 언급했다지만, 이는 최대 마약 소비국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마약 육상 운송의 최종 거점이 된 멕시코의 슬픈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06년부터 2010년 무렵까지 적어도 30명 이상의 기자들이 카르텔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하는 등 2006~2012년 펠리페 칼데론의 임기 6년간 최소 6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이 피살되었다. 그 밖에 실종자도 2만 7,000명에 이르렀다. 

2010년 9월 7일에 발표된 멕시코 정부의 한 연구에 따르면, 2005~2010년에 멕시코 국내 납치 건수는 317%가 증가했고, 2010년에는 매일 3.7건의 납치나 유괴가 발생했다. 2006년 무렵 멕시코의 살인 사건 발생률은 10만 명당 11명 꼴로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비교해 그리 높지 않았지만, 2008~2009년에 그 수치가 수백 명대로 치솟았다. 멕시코에서 경찰에 비해 군대는 신뢰받는 조직이었는데, 칼데론 행정부는 2010년까지 전체 군대의 25%에 해당하는 4만 5,000여 명의 군인을 마약 카르텔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주요 카르텔의 활동 지역 부근의 길거리에서는 여전히 군인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지만, 정부 당국의 두목 제거 전술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주요 카르텔의 수는 2010년 7~8개, 2015년 9개에서 2021년 16개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2006~2012년 ‘마약과의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국내외의 중론이었다. ‘마약과의 전쟁’ 선포 이후 멕시코의 군대는 지방 경찰의 권한을 넘겨받아 전쟁을 지속해 왔다. 펠릭스의 사례가 예증하듯 멕시코의 연방 사법 경찰은 부패 연루 탓에 2002년 조직 자체가 아예 폐쇄되었지만, 그 외에 악명 높은 납치범 다니엘 아리스멘디(Daniel Arizmendi), 일명 ‘귀 잘라내는 악당’ 등 전직 경찰이 범죄 단체의 구성원이나 두목으로 변신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의 경찰관들이 조직 폭력단의 처형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아울러 2000년 정권 교체 이후 2010년까지 모두 약 10만 명의 군인이 멕시코군에서 이탈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농촌과 도시의 빈민가 출신 청소년들이 군에 합류해 국가의 돈으로 기초적인 훈련을 이수한 뒤 군대를 떠나 돈을 벌기 위해 마약 조직에 가담하는 기막힌 이직(移職) 행태가 드러난 바 있다.
  
자유무역협정의 역할과 세계화의 명암  
마지막으로 ‘마약과의 전쟁’에 작용한 미국의 이중적 역할과 세계화의 명암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은 최대 마약 소비국으로 멕시코의 ‘마약과의 전쟁’의 원인 제공자이면서 동시에 마약 카르텔 소탕에 필수적인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약 3,200 km에 이르고 통관 지점이 50곳에 달하는 지리적 근접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멕시코의 티후아나와 미국의 샌디에고를 잇는 샌 이시드로(San Ysidro) 통관 지점의 북행 도로의 폭은 무려 34차선에 이르는데 하루에 국경 양쪽을 오가는 차량은 약 7만 대, 도보 통행자도 2만 명 정도라고 알려졌으며, 50곳에 이르는 통관 지점의 연간 이용자 수는 무려 3억 5,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1994년 1월 1일부터 발효된 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NAFTA)은 합법적인 국경 통과자의 수를 늘렸을 뿐 아니라 마약 육상 운송 확대의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 아울러 영화 <시카리오(Sicario): 암살자의 도시>(2015)와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2018) 등이 보여주듯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은 현재 마약 유통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인들의 미국 밀입국 알선을 핵심 사업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미 미국 주요 대도시에 거점을 확보한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즐겨 사용하는 자동소총 AK-47, 돌격소총 AR-15를 비롯한 무기는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무기 소유 자체는 불법이지만, 그 무기의 70~90%는 미국의 총기업자로부터 구입한 것이며 나머지는 멕시코 보안 부대나 과테말라 군의 은닉처를 급습해서 탈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마약 소비자이자 무기 제공자인 미국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성장하는 데 사실상 기둥 역할을 한 셈이다. “총기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뿐이다”라고 총기 옹호자들이 주장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미국에서 제작되거나 판매되는 총기류의 상당수가 멕시코 카르텔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예컨대 돌격소총 AR-15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조직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무기 중 하나인데, 2004년에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1994년 돌격소총 금지 조치를 해제했고 이 시점은 멕시코에서 마약 카르텔 간의 격돌이 가속되기 시작한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6). 이처럼 오랜 시간 누적되어 온 다양한 경제, 사회, 역사적 원인이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마약 카르텔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방안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각주
1) 주지하듯이 얀센은 나중에 유명한 제약회사의 창립자로서 100가지 이상의 약에 관한 특허권을 소유하면서 업계의 역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되었다. 
2) 할리스코 신세대 카르텔(Cartel Jalisco Nueva Generación)은 현재 멕시코의 최강 마약 카르텔 중 하나로서 이 카르텔의 두목은 ‘멘초(El Mencho)’로 알려진 1966년생 네메시오 오세게라 세르반테스이다.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엘 멘초’를 체포하기 위해 1,0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3)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 재배되는 코카나무의 잎은 코카인뿐 아니라 청량음료 콜라의 주된 원료이다. 사실 코카나무 잎 자체는 마약이 아니며 오래전부터 피로 회복에 효과가 있는 자양강장제 역할을 해서 그곳 주민들이 즐겨 복용했다. 원주민 코카 재배농(cocaleros) 조합장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코카 잎은 코카인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2006년 9월 UN 총회 연설에서 코카 잎을 들고 그것의 무해함을 주장한 바 있다. 코카나무의 잎은 일정한 가공 과정을 통해 코카 반죽(paste)으로 바뀌고 그 뒤 더 복잡한 결정화 과정을 거치면 벽돌 형태의 코카인이 만들어진다. 박구병, 「벌거벗은 마약 카르텔-라틴아메리카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tvN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진, <벌거벗은 세계사: 경제편>(교보문고, 2023), 339-340쪽 참조. 
4) 뇌물(은)을 받고 협조하거나 총알(납)을 맞고 죽거나,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제함
5) Mark Bowden, Killing Pablo: The Hunt for the World’s Greatest Outlaw (Penguin Books, New York: 2001), p. 51; John Bailey, “Drug Traffickers as Political Actors in Mexico’s Nascent Democracy”, Roderic Ai Camp, ed., The Oxford Handbook of Mexican Politics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p. 466-494. 
6) Ioan Grillo, El Narco: Inside Mexico’s Criminal Insurgency (New York and London: Bloomsbury Press, 2012), p. 21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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