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오피니언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 대중문화 유통구조
싱가포르 심두보 성신여자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과 부교수 2012/12/28
■ 싱가포르의 문화적 딜레마와 문화연구
- 지역, 민족, 문화적 갈등에 대한 타협과 중화주의 전통
ㅇ 말레이계 주변국들에 둘러싸인 다인종·다언어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국내외적으로 인종·민족적 갈등을 최소화하는 것을 주요 정책목표로 삼아왔음.
ㅇ 각 민족의 고유 전통과 문화적 관습을 관용적 태도로 인정하지만, 민족 간 개별화된 문화적 실천은 고착화된 상태임.
ㅇ 인구의 75퍼센트를 차지하는 화교세력이 정치경제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음은 공공연한 비밀임.
ㅇ 1959년 이래 장기집권 중인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은 유교적 가치에 기반을 두어 경제 성장을 이끌었음.
ㅇ 싱가포르 내 화교 집단은 중화주의 문화 전통에 기초하여 국가적 이해관계와 별도로 중국, 대만, 홍콩과 강한 문화적 유대관계를 형성함. 이는 화교 대중문화 권역(Pan-Chinese Popular Cultural Sphere)으로 이해될 수 있음. (아래에 자세한 설명)
ㅇ 화교 집단은 문화적 근접성에 기초하여 20세기 후반에 대두한 일본과 한국의 대중문화에 보다 밀접한 수용성을 발휘함.
- 싱가포르의 학문적 대응
ㅇ 위와 같은 현상에 대해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소재 아시아연구소(Asia Research Institute)의 문화연구 클러스터(Cultural Studies Cluster)는 위 현상을 고찰·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임.
ㅇ 특히, 사회학자 추아 벵홧(Chua Beng Huat)은 2002년 아시아연구소 창립 이래, 문화연구 클러스터를 이끌며 동(남)아시아 문화흐름을 주제로 한 여러 세미나를 조직하며, 싱가포르를 아시아 문화연구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함.
■ 화교 대중문화 권역(Pan-Chinese Popular Cultural Sphere)과 싱가포르
- 화교 대중문화 권역의 역사
ㅇ 1920년대 이래, 동(남)아시아 전역의 화교 집단을 아우르는 대중문화 네트워크가 형성됨.
ㅇ 중국 본토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문화예술인들은 홍콩으로 대거 이주하여, 홍콩이 영화와 대중음악의 제작 중심지로 발돋움하도록 이끎.
ㅇ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중국 본토 대신 동남아시아가 홍콩 영화의 주요 시장으로 발전함.
ㅇ 20세기 중후반의 냉전은 중국에서 제작된 영화의 수출지역이 공산권 국가로 제한되게 만들고, 화교 대중문화 권역에서 배제되도록 이끎.
ㅇ 1970-80년대 홍콩 영화는 화교권을 뛰어넘어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로 그 영향력을 확대함.
ㅇ 화교 대중문화 권역은 같은 중국인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통합되었으나, 제작, 유통, 소비의 측면에서 탈중심적, 다중추적, 다언어적 성격을 지님.
- 화교 대중문화 권역 내 각국의 역할
ㅇ 홍콩은 20세기 초반부터 영화 제작의 중심지였으며, 1980년대부터는 칸토팝(Canto pop. 광동어로 노래하는 대중가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함.
ㅇ 대만은 1970년대 이래 만다린어(Madarin.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는 TV 드라마와 대중가요 생산 중심지로 등극
ㅇ 싱가포르는 협소한 시장규모로 인해 (화교는 싱가포르 450만 인구의 75% 가량 차지), 제작보다는 수입 및 소비지로 자리매김함.
ㅇ 싱가포르 소재 산업인들은 1950년대 홍콩영화 제작에 필요한 재원 조달자 역할을 수행함.
ㅇ 중국은 공산정권의 오랜 지배에 따라, 20세기 중반 내내 화교권 대중문화 제작, 유통, 소비에서 배제됨.
ㅇ 연예산업에 꿈을 가진 전 세계 화교들은 홍콩과 대만으로 이주함. (예: 베트남 출신 서극 감독, 말레이시아 출신 여배우 양자경, 싱가포르 출신 가수 스테파니 선 등)
■ 최근 화교 대중문화권의 정치경제적 변화
- 중국의 시장 개방과 언어정치
ㅇ 1978년 경제 개혁에 따른 중국시장의 개방은 홍콩 중심의 광동어 대신 만다린어가 화교권 대중문화의 공통어 자리를 차지하도록 이끔.
ㅇ 대만은 주요 언어인 민난어(Minnan) 대신 만다린어를 발 빠르게 채택하여 이를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음악 등 대중문화 제작에 사용함. 이를 통해 화교권 전역에 유통되는 만다린 팝(Mandarin Pop. 표준 중국어로 노래하는 대중가요)의 중심지로 발돋움함.
ㅇ 1980년대 후반부터는 홍콩의 대중가수들도 기존의 칸토팝 대신 만다린 팝을 부르기 시작함.
ㅇ “강타이”(港台: 홍콩의 한자인 香港의 港과 대만의 한자인 台灣의 台를 조합한 단어)라는 단어는 화교문화권 내 홍콩과 대만의 지배적 성격을 상징함.
- 중국의 시장 개방과 공동제작 열기
ㅇ 2002년 WTO 가입조건으로 문화시장을 개방한 중국은 외국 TV 프로그램 수입을 늘림.
ㅇ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에 쉽게 진입하기 위해 홍콩, 대만의 많은 영화 및 대중문화 종사자들은 중국 본토에 제작 거점을 세움.
ㅇ 또한, 중국과 그 주변국과의 영화, TV드라마 등 공동제작이 활성화됨.
■ 화교 대중문화 권역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개입 혹은 통합
- 일본
ㅇ 일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미 오랫동안 동(남)아시아 지역에 침투해왔음.
ㅇ 1990년대 “토쿄 러브스토리”(1991)를 필두로 한 일본 “트렌디”드라마 열풍은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의 대중문화 헤게모니를 확고히 함.
- 한국
ㅇ 1990년대 후반 중국, 대만 등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 드라마 열풍(“한류”)
ㅇ 한류는 초기 예상과 달리 쉽사리 소멸되지 않고, 2000년대 내내 아시아 전역에서 맹위를 떨침. 이를 통해, 아시아인들은 미국을 준거로 한 대중문화가 아닌 아시아적 대중문화를 상상하기 시작함.
- 기존 화교문화권에 대한 영향
ㅇ 한류 열풍의 지역적 확대 통해 중화권에 국한된 밀접한 문화교통이 전 아시아 지역으로 확대됨.
ㅇ 홍콩과 대만은 한국 TV 드라마에 대한 더빙과 자막 제작의 중심지 역할을 함. 이를 통해 이 두 지역은 화교 대중문화 권역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에 더해 한류의 중개자 기능도 담당함.
ㅇ 싱가포르 국립대학교(NUS)의 사회학자 추아 벵홧(Chua Beng Huat) 교수는 한국과 일본 대중문화의 초국경적 전파가 화교 대중문화 권역 (그는 이를 “Pop Culture China”로 부름)을 보다 확대한 “동아시아 대중문화”(East Asian Pop Culture) 권역의 형성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함.
■ 전망과 평가
- 싱가포르는 동북아에 속하는가, 동남아에 속하는가?
ㅇ 지역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속하는 싱가포르는 화교가 갖고 있는 정치경제적 헤게모니 및 인구 다수성으로 인해 문화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 가까운 것이 사실임.
ㅇ 위와 같은 화교 중심적 주장은 다문화사회 싱가포르의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학문적 시론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함.
ㅇ 300만이 조금 넘는 화교 인구로 인한 협소한 시장 규모는 싱가포르 미디어산업의 운신 폭을 지속적으로 제한할 것으로 예상됨. 결국, 싱가포르 미디어산업은 자체 제작 대신 수입상영을 통해 비용효율을 높이고자 하고 있으며, 미디어제작단계의 후반제작(post production) 중심지로 특화하고자 함.
- 동아시아 대중문화 권역이라는 담론의 정치성
ㅇ 추아 벵홧 교수는 한국·일본 대중문화의 아시아 유통이 화교권에 기반하고 있으며, 기존의 화교권에 통합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함.
ㅇ 이러한 주장이 새로운 현상을 고찰하고 이해하는 데에 효율적인 분석틀을 제공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나, 중화 중심적 시각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음.
ㅇ 아시아 전역 및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류의 영향력을 화교 권역으로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
ㅇ 태국을 중심으로 해 인도차이나반도 제국 간에 이루어지는 초국적 문화유통, 이슬람 문명을 고리로 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남부 지역 등지에 형성된 문화유통 현상 등이 배제되어 있어 소지역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
※ 참고자료
- Chua Beng Huat. (2008). East Asian Pop Culture: Analyzing the Korean Wave. Hong Kong: Hong Kong University Press.
- Chua Beng Huat. (2012). Structure, Audience and Soft Power in East Asian Pop Culture. Hong Kong: Hong Kong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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