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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필리핀 민주주의에 대한 일견(一見)

필리핀 김동엽 부산외국어대학교 동남아지역원 HK연구교수 2012/03/30

지난 1월에 시작된 필리핀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심판은 연일 각종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필리핀 정치권은 물론 일반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원의원들로 구성된 검사 측과 피고소인인 대법원장 측의 변호인단이 연일 공방을 벌이고 있다. 공방의 초점은 대법원장이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였느냐에 맞추어지고 있다. 필리핀 공직자들은 재산내역을 신고해야 하는데, 대법원장이 신고한 재산내역이 실재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과 차이가 있으며, 재산의 과다한 증가에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대법원장의 재산축적에 대한 의구심이 필리핀의 정치인들과 공직자 전반의 문제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냐는 염려도 나오고 있다. 필자가 만난 필리핀 시민사회 활동가는 “이것이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역할을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무튼 현 아키노 행정부와 대법원과의 불화에서 시작된 대법원장의 탄핵사건은 필리핀 민주주의 체제의 현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필리핀은 공직자의 책임성과 법치주의 수준에 있어서 대체로 낮은 평가를 받는다. 세계투명성기구에서 2010년 발표한 부패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에 따르면 필리핀은 178개 국가 가운데 134위를 기록했다. 정치적 자유의 정도를 측정하는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의 2010년 조사는 필리핀을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평가했다. 또한 세계은행연구소에서 1996~2009년 자료를 조사하여 백분율 순위로 발표한 세계거버넌스지수(World Governance Indicator)에 따르면 필리핀은 ‘책임성’ 부분(voice and accountability)에서 40-60퍼센트 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안정성’ 부분(political stability and lack of violence)에서는 20~30퍼센트로 낮게 나타났다. 이와 같은 다양한 조사를 바탕으로 보면 필리핀 민주주의 체제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의 대표자에 대한 책임성과 연관된 제도로는 처벌과 선거가 있다. 처벌은 재임 중에 위법적인 행위를 판단하는 제도이고, 선거는 재임 중에 수행한 정책의 결과에 대한 평가로 볼 수 있다. 필리핀 헌법은 공직자의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직자들의 불법행위를 감찰하고 기소할 수 있는 헌법기관으로 옴부즈맨(Ombudsman)을 두고 있으며, 더불어 고위 공직자에 대한 탄핵제도를 두고 있다. 필리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탄핵의 대상은 대통령과 부통령, 대법원 판사, 옴부즈맨, 그리고 헌법위원들(공직자위원회 위원, 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감사원 위원) 등이다.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는 기관은 하원이며, 의원들에 의해 탄핵발의가 있을 경우에는 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총회에서 재적의원 1/3의 동의로 탄핵이 의결된다. 하원에서 탄핵이 결정되면, 즉시 상원으로 옮겨져 24명의 상원의원들을 재판관으로 하는 탄핵재판이 이루어진다. 재판 결과 재판관 2/3가 유죄판결을 내리게 되면 탄핵이 확정되어 해당 공직자는 직위를 상실하게 된다.

 

1986년 민주화 이후 탄핵제도는 필리핀 정치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2001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하원에서 탄핵되고, 상원에서 탄핵재판이 진행되던 도중에 시민들의 대모와 일부 인사들의 정권 이탈로 인해 실권한 바 있다. 이후 아로요 정권 하에서도 수차례의 탄핵안이 상정된 바 있으나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현 아키노 정권하에서는 진행 중인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안 이외에도 옴부즈맨에 대한 탄핵이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본인이 직위를 사임하였다. 또한 아키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시도도 의회 반대파로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다. 대통령제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로 선출되어 정해진 임기를 수행하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극히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그 절차 또한 지극히 어렵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필리핀 헌법은 탄핵의 대상이 되는 조항을 헌법위반, 반역, 뇌물, 부정부패, 강력범죄, 그리고 국민의 신임에 대한 배신 등 다분히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하원 재적의원 1/3의 동의로 탄핵이 가결되는 수월성으로 인해 정치적 오용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탄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필리핀 대통령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원에서 일정수의 의원들을 집권연합에 끌어들여야 한다. 이는 곧 대통령과 의회 간의 거래(horse trading)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대통령제 민주주의의 이상은 정해진 임기를 보장받은 대통령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회개혁과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필리핀 정치체제의 효율성이 비교적 낮게 평가되는 원인은 정부의 주축이 되는 대통령과 의회가 공공정책의 올바른 추진을 위한 견제와 균형의 관계를 이루기보다는 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거래와 협상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정치행위자들의 정치적 행태를 규율하고 심판하는 정당체제와 선거제도가 제대로 발달해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리핀 대통령은 강력한 정당을 기반으로 선출되기보다는 개인적인 인기와 일시적인 연합세력의 도움으로 선출되기 때문에 자신의 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당선 후 의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곧 의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수용하고 타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의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전통적 엘리트들은 확고한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정당이 이들의 정치적 운명에 미치는 영향이 미흡하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행태에 대한 규율이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정당정치의 부재는 의원들로 하여금 의정활동의 목표를 자신의 지역구에 보다 많은 혜택을 가져가기 위한 것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이는 곧 국가 전체를 위한 사회개혁이나 경제발전과 같은 거시적 정책에 효율성을 발휘하기 힘들게 만든다.
 

정치체제의 안정성은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회의 욕구를 수렴하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필리핀 정치체제의 안정성이 아주 낮게 평가되는 것은 체제가 이러한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전국적인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당선된 대통령과 지역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의회 의원 간의 관계를 원활하게 연결하는 정당체제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두 권력기관의 충돌은 헌정붕괴의 상황을 촉발하기도 한다. 대통령은 의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국가 이권을 배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원들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치적 과정들은 많은 경우 뇌물이나 특혜와 같은 부정의 소지가 많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대통령의 신뢰도와 리더십에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이는 또한 야권 의원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필리핀에서는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불만이 고조될 때마다 군부쿠데타에 대한 의혹이 고개를 든다. 이는 언제라도 필리핀 민주주의 체제가 붕괴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불안정한 헌정체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에 제정된 필리핀 헌법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필리핀 헌정체제가 필리핀 정치행위자들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필리핀의 전통적 정치엘리트들은 국가권력이 제공하는 이권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지역기반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한 원활한 권력순환 과정은 이들이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권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필리핀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는 기존의 제도적 틀을 유지하려고 하며, 이와 같은 기존의 틀을 부정하는 정치지도자에 대해서는 심판을 가할 수 있는 나름의 제도를 갖추고 있다. 2001년 에스트라다 정권이 붕괴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현 아키노 대통령이 추진하고자 하는 반부패 개혁정책이 기존의 정치 엘리트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정권의 안정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예상도 필리핀 민주주의 체제의 이와 같은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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