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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파키스탄 개관과 근대정치사 (1)

파키스탄 신규섭 한국외대 중앙아시아 연구소 연구교수 2012/08/24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는 미지의 땅, 파키스탄은 어떤 나라인지, 근 현대 정치를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파키스탄이란 국가명은 ‘성스러운 땅(Holy Land)’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청정한 땅’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현재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이기에 불교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청정’이란 단어보다 ‘성스러움’의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본다. 물론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가 성립되기 전, 대승불교가 출현한 지역이다. '고귀함'의 의미를 가진 아리안 족이 다수를 이루고 드라비다와 몽골족, 이외에도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다.

 

파키스탄은 북부 지역을 포함해, 펀잡(펀자브), 신드, 케이바르 파크툰 커흐(개명하기 전, 사르하드(북서변방주)로 불림), 발루치스탄의 4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케이바르는 흔히 국내에서 카이버로 부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개가 아닐까 하는데, 역사적으로 무역 로이자 침략의 통로로 이용되어 왔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연결한다. 파키스탄 인구는 약 1억 9천만 명으로 세계 6위권의 인구대국이며, 젊은 층의 인구 증가가 상승 추세에 있다. 펀잡 주가 인구 면에서 55-60%이상을 차지하며, 정치와 군사 등의 방면에서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어 영향력이 가장 큰 지역이다. 펀잡은 고대부터 학문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며 고대 학문의 출발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각각의 주는 지형적인 면에서도 전혀 다른데, 펀잡 주는 곡창지대로서 비옥한 토질이며, 신드 주는 반사막 지대로 각종 곡물이 많이 산출되고 케이바르 파크툰 커흐(사르하드) 주는 k2봉과 같은 험준한 고봉이 많은 산악지대, 발루치스탄주는 사막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구도 가장 적다.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4일, 한국보다 1년 1일 빨리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키스탄과 인도가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종교가 다른 이유만으로 분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도의 서북지역에 위치한 파키스탄은 고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고대문명의 발상지, 인더스강을 끼고 있는 고대국가이다. 알렉산더 침략이후 최초의 제국을 성립시킨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아쇼카 황제를 비롯해, 파키스탄 지역은 일부 시대 인도 지역에 포함되었지만, 고대 파키스탄은 대체로 이란,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과 시대별로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역사와 문화의 동질성을 유지해 왔다. 일례로 파키스탄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모함마드 이븐 가셈(Mohammad Ibn Ghasem)이 711년 파키스탄의 신드 지역을 침략함으로써, 고대 국가 파키스탄이 사산(226-642)조 페르시아 제국과 분리되어 독립정부를 구성했다. 11세기 초 이후 파키스탄으로 대변되는 무슬림 세력이 힌두 세력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은 한 국가로 비쳐졌던 게 사실이다. 19세기 중엽이후 인도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꾸준히 주창해 왔으며, 영국 지배자들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사회-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실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이란 국명은 1947년부터 인도 무슬림을 대신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은 서남쪽에 이란, 북서쪽에 아프가니스탄, 북서-북동지역에 타지키스탄과 중국, 동쪽으로 인도와 접하고 있으며, 동쪽에 위치한 인도와의 관계를 제외하면 대체로 대외관계가 좋은 편이다. 인도와는 3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렀으며, 캐시미르 지역과 관련해서 양국 간에는 크고 작은 교전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캐시미르 인들은 분리 독립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체포와 구금뿐만 아니라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

 

언급한대로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과 같은 국가들은 파키스탄과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공동의 역사를 같이해온 국가이다. 이 지역은 고대부터 페르시아 권 국가로 인식되어 왔다. 신 실크로드의 소생과 더불어 이들 국가 간에 한층 더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영국에서 독립하기 전, 파키스탄이 인도와 한 국가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는 우리로는 인도·파키스탄 아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아, 근대 정치사적인 맥락에서 간략하게 언급하려 한다.
 

11세기 초 가즈나비 왕조 이후 무슬림들은 무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8백여 년 동안 지배세력으로 인도를 통치했다. 우리는 파키스탄을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라고만 알고 있지만, 인도-파키스탄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무갈 제국을 지배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무갈 제국은 동양의 위대한 제국중의 하나였다. 중세 수 세기에 걸쳐 파키스탄이 인도를 지배하면서 한 나라처럼 보였다. 특히 영국이 인도를 침입하고, 힌두 세력과 힘을 합치면서 지배계층이었던 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되었다. 영국이 친 힌두 정책을 취하면서 만들어낸 역사적 왜곡은 학문적으로도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데, 역사와 문화적으로 대체로 페르시아 권에 속했던 파키스탄의 문명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인도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논문을 통해서나 학문적인 논쟁을 통해 하나 하나 밝혀져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파키스탄의 근대 정치에 관해 살펴본다. 독립 전후의 상황에서 7-80년대를 거치고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을 몇 시기로 나눠 살펴보는데, 우선 독립 후의 상황을 보자.

 

파키스탄을 건국한 인물은 모함마드 알리 지나(Mohammad Ali Jinnah, 1876-1948)다. 그는 당시 인도 무슬림뿐만 아니라, 전 인도의 지도자였다. 특히 간디가 인도로 돌아오기 전까지 알리 지나가 인도 국민회의뿐만 아니라, 1906년에 결성된 무슬림 연맹을 이끌었다. 파키스탄의 창립자로 일컬어지는 알리 지나는 그의 활약과 업적에 비해 국내에서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나와 함께 파키스탄의 성립에 기여한 또 다른 인물은 모함마드 이크발(무함마드 이끄발, 1877-1938)이다. 그는 사실상 인도와의 분리를 주창하면서 '두 국가 이론(Two Nation Theory)'를 제창했다. 이크발은 20세기 이슬람권 최고의 사상가이자 시인중의 한 사람이며, 지나의 추천으로 전인도 무슬림 연맹 회장에 올랐고 1930년 알라하바드에서 '두 국가 이론'을 내놓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도 이런 이론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크발은 이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어 주창했다.   

 

모함마드 알리 지나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의해 파키스탄이란 국가가 성립되었으며, 그는 '가이드 아잠'이라고 하는 별칭이 늘 따라 다닌다. 위대한 지도자 또는 국부라는 뜻인데, 파키스탄의 공공기관, 교육기관 등 어떤 장소에 가도 그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독립 이후 최초로 파키스탄 총독 자리에 올랐다. 그는 신생국가의 여러 제도를 조직하며 업무를 수행했는데 리야카트 알리 칸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나는 국가의 운명을 개척할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고 독립 다음해 세상을 떠났다.

 

지나의 사망 이후 리야카트 알리 칸은 커자 나지무딘을 총독의 자리에 앉혔지만 실제적인 권력은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고 총독으로부터 수상으로 권력이양을 시도했다. 지나와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던 리야카트 알리 칸이었기에 새로 임명된 나지무딘은 이견을 제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51년 리야카트 알리 칸의 암살 이후 나지무딘은 총독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상 직을 떠맡지만, 곧 굴람 모함마드를 총독에 추천했다. 파키스탄의 국부 알리 지나는 총독과 수상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의회 정치를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나라를 반석위에 올리고자 시도했지만, 이후 파키스탄의 권력구조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를 넘나드는 듯한  운용 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혼용된 정치체제를 활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독립 이후 파키스탄 정치의 권력구조를 보면,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가 계속 병행돼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파키스탄 지아 울 학 대통령 때 제8차 수정 헌법을 통해 대통령에게 총리, 내각 및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여 대통령의 권한 강화 규정을 추가했다고 알고 있지만, 독립 이후 의원내각제-대통령제-의원내각제-대통령제로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물론 정부가 바뀌면서 중간에 계엄령 정권이 등장했다. 수상과 대통령이 권력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임기 5년을 마치지 못한 채 물러나면서 정치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파키스탄 독립 이후의 상황은 해방이후의 한국의 정치 상황과도 닮아 있으며, 정치인의 암살과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수차례 반복돼 왔다. 다민족 국가로 이뤄져 있는 파키스탄은 각 민족 간에 갈등이 상당히 심하다. 한국의 지역감정보다 정도가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총의 소지가 자유로운 다민족 국가에서 이런 지역감정은 민족 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져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한다. 정당 역시 전국적인 정당이 있지만, 지역 구도에 기반을 둔 정당의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다. 다음 호에 파키스탄의 정당을 비롯해 근대 정치의 후속편에 관해 언급하면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에 관해서도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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