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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태국사회에서 ‘국가화해’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태국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2/05/30

최근 태국사회에 ‘화해’라는 화두가 다시 부상하였다. 직접적인 이유는 아피싯 민주당 집권 시기인 2010년 방콕에서 빚어진 정부군과 ‘붉은 셔츠’ 시위대간의 유혈 충돌에서 빚어진 희생자 문제 처리와 관련해서이다. 이미 태국에서는 2004년 탁신의 타이락타이당 집권 시기에 타이남부지역 대규모 참사를 계기로 국가화해 시도가 있었다.

 

태국은 그동안 다른 동남아시아국들에 비해 국가통합의 정도가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2001년 탁신 집권 이후 태국사회는 도시-농촌간, 계급간, 종족간 갈등의 수위가 고조되었다. 우선 무슬림-말레이 인구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태국 남부지역에서의 폭동사태는 태국사회가 종족간 갈등이 은폐되어 있는 다종족사회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 중 가장 비극적인 사태는 2004년 10월 25일에 태국 남부 나라티왓주 딱바이 지역에서 정부군이 비무장 무슬림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7명을 사살한 뒤, 시위 현장에 있던 1200여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군부대로 압송해가는 도중 79명을 압사케한 이른바 ‘딱바이 참사’이다. 이 참사를 계기로 140여명의 대학교수들이 군에 의해 빚어진 인권유린행위에 대한 공식사과, 관련자 처벌, 지역 내 공안요원 활동 자제, 태국남부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장에 시민사회 참여 보장, 평화적 수단을 통한 태국남부문제 해결 등을 담은 공개서한을 당시 수상이던 탁신 친나왓에게 보냈다. 탁신수상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남부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화해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민-관 협력기구로서 2005년 3월에 출범하였고, 의장으로 전 과도수상인 아난 빤야라춘, 부의장으로 시민사회 지도자인 쁘라웻 와시를 위시해서 타이 남부지역 대표 17명, 남부지역 외 시민사회 대표 12명, 정부를 포함해 야당, 상원의원 등 정치권으로부터 7명, 안보와 개발관련 공무원 12명 등 총 50명의 위원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2006년 9월 쿠데타로 탁신 수상이 축출된 이후 갈등의 중심지가 타이남부에서 방콕으로 이동하였다. 그 중심에는 탁신 친나왓이 있었고 태국사회는 반탁신과 친탁신으로 확연하게 분열되었다. 각기 입고 있는 셔츠의 색깔에 따라 전자는 ‘붉은 셔츠’로, 후자는 ‘노란 셔츠’로 불리웠다. ‘붉은 셔츠’는 친탁신세력으로서 2006년 쿠테타에 대해 관대했던 ‘노란 셔츠’를 반민주적 파시스트세력이라고 비난하였고, ‘노란 셔츠’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탁신에 대해 절대 충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붉은 셔츠’를 탁신의 선동정치에 놀아나고 있는 우매한 대중으로 폄하하였다.


수도 방콕의 불안정성이 폭발한 결정적 계기는 ‘노란 셔츠’, 즉 <민주주의민중연대(PAD)>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피싯 웨차치와의 민주당 정권이 방콕 중심가를 점령한 ‘붉은 셔츠’를 유혈진압한 지난 2010년 4월과 5월이었다. 특히 4월 10일 당시 아피싯 수상의 명령하에 시위대 진압이 시작되면서 19명의 시위대원, 6명의 군인, 1명의 일본인 기자가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 무렵부터 ‘붉은 셔츠’ 부대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 지도자가 체포되면서 시위가 종결되는 2010년 5월 19일까지 약 2개월 동안 92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유혈사태의 후유증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피싯 정부는 <진실규명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2010년 7월 17일부터 2012년 7월 16일까지 2년을 활동기간으로 한 국가-시민사회 협력기구로 6명의 자문위원을 두었다.  


2011년 8월에 출범한 친탁신계 잉락 친나왓 정부는 2010년 유혈진압에 따른 희생자 문제와 망명 중인 탁신에 대한 사면문제를 다루기 위해 <진실규명과 화해위원회>에 보다 무게를 실었다. <진실규명과 화해위원회>는 이미 국가폭력의 피해를 입은 희생자 1658명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에 대한 보상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또 <진실규명과 화해위원회>는 <쁘라차띠뽁국왕재단>과 함께 국가화해 차원에서 망명 중인 탁신에 대한 사면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잉락정부는 국가화해라는 사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까지 고려하였다.


이에 대해 야당인 민주당 쪽에서는 잉락정부가 국가화해라는 연막을 치면서 사실상 탁신의 귀국과 면책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반면 해외망명 중인 탁신도 국가화해 차원에서 2010년 유혈진압 책임자에 대한 사면을 주장하였다. 대다수의 ‘붉은 셔츠’도 이러한 화해노선에 동조하였다. 현 잉락정부와 <진실규명과 화해위원회>는 국가화해모델 구축을 위해 2006년 쿠데타를 전후로 발생한 정치적 소요의 희생자들의 의견 수렴에 나섬과 동시에 국가화해법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잉락정부가 구금되어 있는 ‘붉은 셔츠’ 지도부들을 석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2010년 유혈진압 사태 희생자 쪽에서는 진상조사->사법절차->보상->사면이라는 4단계가 국가화해에 이르는 조건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을 비롯한 반탁신진영과 ‘붉은 셔츠’ 내 강경파는 정부주도의 국가화해모델 구축에 대해 비판적이다.


우선 반탁신진영은 국가화해모델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지지하지만 국가화해가 부패문제로 실형을 받은 탁신 전 수상을 사면해주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탁신이 조국 타이를 볼모로 잡고 자신에 대한 사면을 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군부 반민주당 강경파는 탁신의 동생인 잉락 수상이 2010년 유혈진압의 책임자격 군부 엘리트들과 화해노선을 취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특히 이들은 잉락정부가 한편으로는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의 배후인물이자 존왕파의 수장(首將)이라고 할 수 있는 쁘렘 띤술라논과 2006년 쿠데타의 주역인 손티 분야랏끌린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2010년 유혈진압의 희생자들 혹은 그 가족들에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없이 금전적인 보상을 계획하고 있는 것에 불만스러워 하고 있다.


법제도적 측면에서 보자면 타이에서의 국가화해모델의 구축은 2006년 쿠데타 이후 만들어진 2007년 헌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반군부-반민주당 강경파 쪽에서 보자면 2007년 헌법은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에 의해 만들어진 반민주 헌법으로서 전혀 정당성이 없다. 그러기에 이들은 1997년 헌법으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반면 민주당을 위시한 반탁신파는 탁신과 같은 제왕적 수상을 탄생시킨 1997년 헌법의 독소조항을 수정한 2007년 헌법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주장한다.
 
태국사회의 안정은 국가화해를 바라보는 이들 시선 간의 차이가 얼마만큼 좁혀지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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