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영역 건너뛰기
지역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연구정보

[역사] 인도의 독립: 마하트마 간디와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갈등의 역사를 중심으로

인도 국내연구자료 기타 이정호 남아시아연구 발간일 : 2009-02-28 등록일 : 2017-08-11 원문링크

인도 국민의회에서 진나의 상승은 인도 국민 의회와 무슬림 연맹 사이의 러크나의 협정 체결에 공헌한 그의 기여에 힘입은 바 크다. 1916년 러크나우에서 인도 국민 의회의 급진파와 중도파 그리고 무슬림 연맹의 구성원들이 모여 인도 국민 의회가 어떻게 종교적, 정치적 분쟁들을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가졌다. 당시에 즈음하여 간디는 러크나우 협정의 공표나 어떤 다른 운동에 관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진나가 정치에 활발히 관여를 한 반면에 간디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나와 간디의 마찰은 힌두교에 기반을 둔 간디의 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 인도 국민 의회와 진나의 관계는 1918년 간디가 자치를 획득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시민 불복종 운동과 힌두 가치를 채택했을 때 불편하게 되었다. 법률가였던 진나에게 이것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나는 간디의 청원, 즉 학생들도 시민 불복종 운동에 동참하라는 것에 반대를 표명하였다. 진나는 간디의 킬라파트 운동을 종교적 광신주의라 비판을 하였다. 실제 1920년에 그는 인도 국민 의회를 탈당하고, 간디의 저항 방법이 힌두와 무슬림간의 동맹을 잘라놓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네루 보고서에 응답하면서, 진나는 인도 국민 의회와 무슬림 연맹에 만족한다고 주장한 “진나의 14개 프로그램”을 제창한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인도 국민 의회뿐 아니라 다른 당들에 의해서도 거부당한다. 실제, 네루 보고서와 진나의 프로그램 사이에는 차이가 거의 없다. 이 시점까지, 진나는 힌두와 무슬림간의 통합 없이 인도의 발전은 없다고 믿었다. 이 무렵, 진나는 정치적으로 뿐 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진나와 떨어져 살아 왔던 그의 둘째 부인이 1929년 병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40대 초반에 겪은 이러한 역경은 그의 정치 행보에 아마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937년 선거에서 낙방한 후, 진나는 힌두와 무슬림이 동맹 내각을 창설함으로서 영국에 맞서야한다고 제안하였으나, 이러한 제안은 거절되었다. 뒤이은 1937년 지방 선거에서 있었던 사건은 진나에게 무슬림은 자신들만의 민족적 자의식을 개발시켜야 함을 깨닫게 했다. 1940년 3월, 라호르에서 있었던 무슬림 연맹의 모임에서는 100,000만이 모였는데, 진나는 파키스탄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간디에게는 힌두와 무슬림의 화해가 우선이었고, 진나에게는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우선이었다. 두 지도자는 남아시아의 운명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능력과 지혜를 사용하여 타인을 설득하려 최선을 다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실패함에 따라, 인도는 유혈참사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 독립을 위한 길은 열리고 있었다.

본 페이지에 등재된 자료는 운영기관(KIEP)EMERiCs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