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영역 건너뛰기
지역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연구정보

[역사] 인도의 독립과 파키스탄의 탄생: 마하트마 간디의 활동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 인도 국내연구자료 학술논문 이정호 남아시아연구 발간일 : 2008-02-29 등록일 : 2017-08-11 원문링크

1934년 9월 간디는 국민회의 인텔리들(사회주의자들)과의 갈등을 시인하면서 1920년대부터 몸담았던 국민회의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민회의의 운영위원회와 전인도 국민회의 회의에 참석하고 토론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간디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 논문은 2차 대전을 전후한 힌두-무슬림의 갈등과 '인도를 떠나라'는 운동까지의 역사의 한 부분을 조명해 보았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인도 총독 린리스고 경은 인도도 전시 비상사태임을 선언했다. 총독의 선언은 전쟁에 인도의 자동개입을 뜻하는 것으로 인도인들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전쟁으로 야기된 위기는 국민회의로 하여금 영국과 대치국면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분리독립이 이루어지기까지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은 서로 반대의 길을 달리게 된다. 진나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 철학, 사회적 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두 문명에 속해 삶의 양상도 서로 다르다고 강조하고 따라서 무슬림들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그들의 조국, 그들의 영토, 그들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일본이 랑군을 점령하고(1942.3) 인도의 문을 두드리자 다급해진 윈스턴 처칠은 크립스 사절단을 파견 하였다. 스태포드 경이 마하트마에게 보여준 정부의 초안에는 인도 연방에 완전한 자치령적 지위가 부여되며, 헌법은 인도인들이 스스로 제정할 것이며,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들어있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전쟁기간 중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영국 정부는 전체적인 전쟁 사업의 일부로서 인도의 방어를 책임지고, 통제와 지휘를 유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간디는 와르다에서 열린(1942.7.14) 운영위원회에서 국민회의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여기서 영국에 대해 대규모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제의하는 간디의 '인도를 떠나라' 라는 운동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 운동은 모든 인도인들이 영국인들을 향해 외친 함성이요, 가슴속에서 나오는 절규였다. 바로 다음날 간디, 네루, 아자드 등 국민회의의 최고지도자들이 체포되어 푸나의 아가칸 궁으로 끌려갔다. 지도자들의 체포는 대중의 폭력시위를 낳았고, 정부는 이런 시위들을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인도를 떠나라는 간디의 마지막 운동도 어떤 적극적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단순한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를 위한 인도 국민들의 의지를 분명하게 천명하였으며, 그리고 영국 지배가 더 이상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다는 국민적 여망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본 페이지에 등재된 자료는 운영기관(KIEP)EMERiCs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