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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 관련하여 NATO의 중대한 의사 결정권자로 무대에 오른 튀르키예

튀르키예 알파고 시나씨 아시아엔(THE AsiaN) 편집장 2022/07/20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 안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고, 특히 안보 위협을 크게 느낀 러시아의 이웃 국가인 스웨덴과 핀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가입을 선언했다. 그러나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안보 위협의 주체인 러시아나 NATO의 맹주국인 미국이 반대해서가 아니라, NATO와 중동 혹은 아시아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해 왔던 것으로 알려진 회원국인 튀르키예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본 글에서 튀르키예 NATO 가입 계기 및 과정과, NATO 회원국으로서 그 동안 NATO와 겪었던 마찰들, 그리고 왜 튀르키예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을 반대하였는지 서술하겠다.

이슬람 튀르키예, 기독교 군사 기구에 가입하다
NATO는 냉전 시기에 초기 시절인 1949년에 유럽에서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화 바람을 저지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 기구이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라는 이름에 걸맞게 창립회원국은 네덜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포르투갈, 캐나다, 이탈리아, 영국, 아이슬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그리고 미국이다. 그렇다면 북대서양에 있는 이 군사 기구에 왜 튀르키예는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승전국이 된 소련은 1917년에 터진 볼셰비키 혁명으로 발생한 내전을 계기로 잃었던 일부 러시아 제국 영토를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복구할 영토뿐 아니라 그 주변 영토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가 노렸던 주변 영토들 중 하나가 필자의 고향인 으드르(Igdir)였다. 으드르와 주변에 있는 카르스(Kars), 아르다한(Ardahan)은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때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면서 러시아 제국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40년 만에 튀르키예로 합병된 지역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소련은 특히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의 연설들을 통해 여러 차례 카르스-으드르-아르다한 지역 영토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고, 이에 튀르키예는 안보 위협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튀르키예는 1945년 이후로부터 오랫동안 지켜왔던 중립 외교 정책을 버리고 친미 라인으로 외교 노선을 변경한다. 튀르키예와 미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지만 튀르키예는 더 포괄적인 군사 동맹을 추구하였고, 소련 위협에 대한 제일 좋은 해결 방안은 NATO 가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결론을 얻은 즉시 튀르키예는 NATO에 가입을 신청했다.

튀르키예가 NATO의 창설 직후인 1949년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NATO에 가입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 당했다. NATO는 단체의 의사결정에 만장일치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튀르키예가 NATO에 가입하게 된다면 NATO의 군사적 전략이 분산 될 거라고 판단하여 튀르키예의 NATO 가입에 반대했다. 쉽게 말하자면, 북대서양 국가들이 굳이 왜 중동 국가의 공산화를 막는 데에 군사력을 할애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뜻하지 않게 튀르키예를 도와주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군이 남한을 침공한 것이다. 튀르키예 정부는 국회 논의도 없이 바로 한국 전쟁에 참전을 결정했고, 튀르키예군이 한국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나름 활약을 보여 주면서 튀르키예의 NATO 가입을 원하는 미국이 다른 북유럽 국가들을 설득할 수 있는 협상 카드를 제공하게 되었다.튀르키예가 NATO에 가입하면 NATO의 군사적 전략을 분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NATO의 병력을 증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미국과 영국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1952년, 튀르키예는 드디어 이웃 국가인 그리스와 함께 NATO에 가입했다. 

키프로스 문제 그리고 튀르키예와 NATO의 갈등
튀르키예는 NATO에 가입을 하면서 공산화의 공포와 소련의 위협을 극복했지만, 기존에 있었던 한 가지 고질적인 문제는 더 복잡해지게 되었다. 바로 그리스와의 영토 분쟁이다.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에는 여전히 정리 되지 않은, 말하자면 한국의 독도와 같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수십 개의 섬 문제가 있다. 일부 섬은 튀르키예가, 일부 섬은 그리스가 영유권을 가지고 있으며 또 일부는 아직도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며 갈등하고 있다. NATO가 군사 동맹 기구이다 보니 회원국이 비회원국과 군사적 위기 상황에 처할 경우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회원국들 간에 군사적 갈등이 발생할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NATO에 가입하게 되면 자국의 기본적인 군사 정보를 NATO와 공유를 해야 하는데, 튀르키예도 그리스도 자국의 군사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이다. 왜냐하면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언제 다시 무력 충돌이 일어날 지 모르는 긴장 상태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 당시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키프로스(Cyprus) 문제였다.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키프로스는 1960년에 독립했지만 그리스계-튀르키예계 국민의 갈등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인구 비율을 단순히 말하자면 7대 3으로, 대다수는 그리스계였다. 그리고 일부 그리스계 국민은 독립된 나라보다는 그리스와의 합병을 원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계-튀르키예계 국민들 간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이러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1974년에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1967년에 들어선 그리스 군부 정권의 우파 장군들은 키프로스에 있는 추종자들을 지원해서 1974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키프로스 정부를 전복시켰다. 정권을 잡은 키프로스의 쿠데타 세력은 국민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단독으로 그리스와의 통일을 선포했다. 그리스와의 통일을 반대했던 튀르키예계 국민을 키프로스 쿠데타 정권이 강력히 탄압하고 학살을 자행하자, 튀르키예 본토에서 키프로스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그리스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은 단순히 튀르키예-그리스 전쟁이 아니었다. NATO 회원국, 즉 군사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고, NATO의 맹주인 미국과 영국에게는 이 사건이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영국이 예측한 혼란이 바로 전쟁 직후에 발생하게 된다.

그리스는 전쟁이 발발한 1974년에 NATO를 탈퇴했다. 그리고 튀르키예도 1975년 7월 20일, 그리스를 마주보고 있는 에게 지역에 NATO로부터 독립적인 에게군을 창설했다. 이후로 현재까지 이어진 튀르키예 육군의 구조는 NATO와 연결된 이스탄불 중심의 1군, 말라트야를 중심으로 한 2군, 에르진잔을 중심으로 한 3군, 그리고 NATO와 무관한 이지미르 중심의 에게군 혹은 4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튀르키예와 NATO의 첫 신경전: 그리스의 재가입 문제
그리스 쿠데타 세력은 키프로스 작전 실패의 영향으로 정권을 잃었고, 그리스는 1974년에 다시 민주화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76년에 그리스는 NATO에 재가입을 신청했지만 가입은 수락되지 않았는데, 여전히 NATO 회원국이던 튀르키예가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모든 회원국이 튀르키예를 설득하려고 했고, 특히 미국은 튀르키예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왜냐하면 NATO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는 공산화 될 가능성이 너무나 큰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튀르키예 정치권을 설득할 수는 없었는데, 좌우익을 막론하고 불과 몇 년 전에 전쟁을 벌였던 그리스의 NATO 재가입을 승인하는 순간 다음 선거의 패배를 예약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튀르키예의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그 어떤 정치인도 그리스의 NATO 재가입을 승인하자고 주장할 용기는 없었다. 그러던 찰나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1980년 9월 12일에 튀르키예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튀르키예에서 1980년대 쿠데타가 발생한 이유는 사실은 너무나 뻔했다. 좌파 학생들과 우파 학생들 간의 갈등이 깊어져 길거리에서 서로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고, 정치인들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이에 군인들이 국가 안정을 되찾고자 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튀르키예 국민도 어느정도 수긍했던 상황이었고, 군인들이 준비한 헌법은 92%의 찬성으로 국민 투표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튀르키예의 쿠데타는 심각한 논란 거리를 남겼다. 

먼저,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바로 NATO 본부에 그리스의 재가입을 승인하겠다고 알린다.튀르키예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그리스가 NATO에 재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논란거리는 1997년에 공개되었다. 1997년에 튀르키예 언론인과 인터뷰를 했던 당시 CIA 튀르키예 지부장 폴 헨체(Paul Henze)는 군사 쿠데타 관련 보고를 받을 때, “쿠데타를 누가 일으켰나?” 라는 질문에 “우리 애들이 했습니다”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튀르키예 국민은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1980년 군사 쿠데타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대중 사이에 1980년 쿠데타는 미국의 공작이었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고, 미국과 NATO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1980년 쿠데타는 초기에는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군부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언론을 극심하게 억압하여 1980년대 말 경에는 여론이 완전히 역전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된 1990년대의 튀르키예에서 9.12 쿠데타의 악몽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던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쿠데타의 미국 공작설은 미국과 NATO를 사탄의 아이콘으로 인식하는 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NATO가 이슬람 지역에서 활동한다
다행히 1990년대 말기부터 튀르키예에서 NATO와 미국의 이미지는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코소보 전쟁에서 세르비아군이 코소보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하자, NATO는 코소보 내전에 개입하여 무슬림인 코소보 편을 든 것이다. NATO의 코소보 내전 개입은 튀르키예 국민에게 NATO와 함께 미국의 이미지도 개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NATO는 원래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창설된 군사 동맹 기구였지만, 단 한 번도 냉전 시기에 군사 작전을 하지는 않았다. NATO의 군사 작전들은 오히려 냉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 리비아 등 이슬람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미국은 냉전 시기에 튀르키예를 NATO에 가입시킴으로써 튀르키예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이용해서 소련의 확장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냉전 시기 이후 NATO내에서 튀르키예의 역할은 크게 달라졌다. 미국이 이슬람 지역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NATO를 통해 튀르키예군과 함께 하다 보니, 나름 이슬람 국가들 내에서의 여론을 조절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아프간 전쟁이었다. 아프간에 파견나간 병력들 중에 그나마 안전한 부대는 튀르키예군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미국 주도하에 NATO는 튀르키예를 이용해 1994년에는 ‘지중해 디알로그(Mediterranean Dialogue)’를 창설해서 지중해에 위치한 무슬림 국가들과, 2004년에는 ‘이스탄불 협력(Istanbul Cooperation Initiative)’을 창설해서 걸프 국가들과 군사 동맹 체계를 만들었다.

튀르키예는 왜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을 반대했나?
사실 튀르키예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가입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튀르키예가 반대하는 이유로 일반 대중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설명은 튀르키예 정부가 말하는 “스웨덴과 핀란드가 테러 조직 쿠르드노동자당(PKK, Kurdistan Workers Party)을 지원하고 있다”이다. 현재 스웨덴을 비롯해 북유럽 국가들에는 수 많은 쿠르드계 이민자들이 창립한 협회들이 있다. 이 협회들의 일부가 몰래 테러 조직 PKK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튀르키예 정부도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고, 필요에 따라 테러조직 지원에 대한 증거물들을 확보하여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그러한 협회들을 해체하도록 한 경우도 많이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튀르키예 정부는 법적 근거를 기반으로 충분히 스웨덴이나 핀란드에서 그러한 조직이나 단체를 처리할 수 있다. 튀르키예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가입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테러단체 지원이 아니다. 

이와 같은 표면적인 이유보다 좀더 심층에 있는 본질적인 이유는, 스웨덴이나 핀란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NATO의 맹주 미국과 관련된 것이다. 튀르키예는 그간 미국에 두 가지 중요한 사안에 대해 요구해 왔다. 하나는 러시아산 S-400 미사일 체계 구매에 대한 제재 조치로 강제 탈퇴 당한 F35 전투기 프로젝트로의 복귀이다. 

두 번째 사안은 좀 복잡하다. 2020년, 미국의 대(對)이란 경제 제재를 위반한 혐의로 레자 자랍(Reza Zarrap)이라는 이란계 튀르키예인 사업가가 수사를 받게 된다. 튀르키예 법무부에서는 풀려났지만, 이 사업가는 협조의 대가로 미국 정부와 협상을 해서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 사업가의 재판 과정이 끝나면 미국의 경제 제재를 위반하는 과정에서 튀르키예 정부 고위급 간부들 중에 누가 국제 법을 어겼는지가 모두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튀르키예 정부는 미국에게 이 사업가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전 행정부 때 미국은 임명된 검찰을 바꾸면서까지 튀르키예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했던 듯 하나, 현재는 미국에서 레자 자랍의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미국이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을 신속히,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서 튀르키예를 F35 전투기 프로젝트에 다시 복귀시킬 수 있다. 그러나 레자 자랍의 재판을 종결 시키고 그를 튀르키예에 송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의의 대가로 튀르키예가 얻은 것
나토 정상회의 개막 전날인 2022년 6월 2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튀르키예, 스웨덴, 핀란드 정상과 옌스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NATO 사무총장은 튀르키예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3자 양해각서를 공개했다. 해당 양해각서에는 튀르키예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 핀란드는 튀르키예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PKK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관련된 모든 테러조직의 활동을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튀르키예가 취한 외교적 이득은 무엇일까? 전술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무기 금수조치 해제나 PKK 관련 문제는 어쩌면 핵심에서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튀르키예가 송환을 요청해 왔던 반정부 기자들을 스웨덴이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졌고, 미국에 있는 이란계 사업가 레자 자랍의 송환도 불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튀르키예를 다시 f35 전투기 프로젝트에 복귀 시킬 수 있다는 신호를 주었다. 

튀르키예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NATO 가입 과정에서 얻어낸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동안 성실하지 않는 NATO 회원국으로서 러시아와 좀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잃었던 것들을 회복한 수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으며, 외교적으로 큰 이득을 취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가 40년 만에 다시 한 번 NATO 역사에서 중대한 의사 결정권자로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만은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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