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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태국 법치주의의 진로

태국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2/07/23

흔히 민주주의의 요건으로 법치주의(rule of law)를 든다. 그러기에 민주화란 법치주의의 안착을 의미한다. 현재 태국에서는 2007년 헌법 개정을 두고 의회 안에서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집권여당 프어타이당과 이를 반대하는 제1 야당 민주당이, 의회 밖에서는 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붉은셔츠’와 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노란셔츠’가 격돌하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러한 대치 정국의 중심에는 1997년 헌법과 2007년 헌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엄청난 시각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우선 1997년 경제위기 직후 통과된 신헌법은 ‘국민헌법’으로까지 불리었는데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태국 민주주의의 신선한 출발점이 되었던 1992년 이후 반 군부 민주화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일단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헌법개혁운동을 펼쳤다. 급기야 이 운동이 입법부에 받아들여져 99명의 독립적인 헌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들 중 76명은 전국 각 도에서 뽑혔고, 나머지 23명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선출된 전문가집단이었다. 이들 헌법기초위원들을 선출하는 과정에 학계, 인권단체, 여성단체, 농민단체 등이 관여하고 신헌법 초안 의견수렴 과정인 공청회에 대규모의 인원이 참여하는 등 1997년 헌법의 대표성은 역대 그 어느 헌법보다 컸다. 

그러나 1997년 헌법은 2006년 9월 18일에 탁신 퇴출을 목표로 삼았던 군부 쿠데타로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되었다. 쿠데타 주역들이 중심이 된 국가안전보장회의(CNS)는 1997년 헌법을 대체할 신헌법 제정 준비를 2006년 12월부터 시작하였다. 헌법제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듬해 2007년 1월에 헌법기초위원회가 발족하였다. 헌법기초위원 35명 중 10명은 국가안전보장회의(CNS) 소속이었다. 헌법기초위원회의 목표는 명확했다. 탁신과 같은 ‘강력한 수상’의 탄생을 예방하고 1997년 헌법 이전처럼 여러 정당에 의한 연립정부의 성립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국민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정부의 언론분야 개입을 금지하고 고위 관리의 언론사에 대한 경영관여와 주식보유를 제한했다(48조). 국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와 관련해서는 국민들의 법안 제출권 조건을 5만 명에서 1만 명으로 완화했다(163조). 수상의 권한과 관련해서는 하원의 수상 불신임 요건을 재적 의원의 5분의 2이상에서 5분의 1이상으로 완화했다(158조). 또 수상의 임기를 최고 8년으로 제한했다(171조). 하원과 관련해서는 소선구제를 중선거구제로 전환하고 비례대표의원도 과거 100명에서 80명으로 축소했다. 상원과 관련해서는 과거 전원 선출 제를 임명제와 선출 제 병용으로 바뀌었다. 의원자격으로는 과거 대학학력 이상이라는 학력자격을 폐지했다. 이외에 1997년 헌법에 없었던 조항으로는 국가경제의 방향으로 ‘자족경제’의 구현을 명기하였다(83조). ‘자족경제’는 1997년 경제위기 직후 국왕이 제시한 위기 극복의 경제철학으로서 이것이 2007년 헌법에 명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헌법기초위원회에 존 왕파의 영향력이 컸음을 의미한다. 

2007년 헌법체제는 개선된 일부 조항에서 볼 수 있듯이 일견 국민의 정치참여를 보강하고 ‘강력한 수상에 의한 정치’를 ‘시민을 주역으로 하는 정치’로 진전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국민들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못 받고 출범함에 따라 정당성 시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2007년 헌법 1차 초안은 2007년 4월 19일에 공표되어 7월 6일에 최종 초안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최종 초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같은 해 8월 19일에 실시되었다. 국회에서 심의하지 않고 국민투표에 부쳐진 것은 국가안전보장회의(CNS)가 기초한 헌법이 아닌 국민이 참여한 헌법이라는 정당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화 시도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군정체제하임에도 불구하고 전국투표율이 58%밖에 안 되었고 투표 결과도 찬성이 57%, 반대가 41%였다. 민주당 지지자가 많은 남부에서 찬성이 87%, 방콕 수도권을 포함한 중부에서 65%였던 반면, 동북부에서의 62%에 이르는 반대표는 군정 당국으로서는 가히 충격이었다. 신헌법은 2007년 8월 24일에 공포되었다. 

하지만 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이전인 그 해 5월 30일에 헌법재판소가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에 대한 해산과 100여명에 이르는 타이락타이당 중진들에게 향후 5년간 정치활동 금지 명령을 내린,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로 표현될 수 있는 이례적인 사건이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연 타이락타이당을 해산시킨 헌법재판소는 어떠한 국가기관인가? 태국에서는 1947년 이래 헌법재판위원회가 있어왔지만 유명무실했다. 그런데 1997년 헌법은 헌법재판위원회를 헌법재판소로 승격시켰다. 헌법재판소는 일반 법원과는 다른 특별한 지위를 갖고 1998년 4월에 출범하였다. 정당위헌 심사와 정당 해산명령권 이 두 가지는 태국 헌법재판소의 특권이었다. 이렇듯 헌법재판소는 헌법에 근거한 독립기관으로서 절대적 권한을 가지며, 1997년 헌법을 폐기한 쿠데타 이후 과도헌법 하에서도 존속하였다. 급기야 헌법재판소는 2008년 12월에 타이락타이당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집권당 피플파워당을 또다시 해산시켰다. 헌법재판소의 특정 정파를 겨냥한 잇따른 정당해산 명령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선출된 권력에 대한 통제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집권 프어타이당이 현 입헌군주제를 바꾸려는 헌법 개정 의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 다시 말해 위헌 여부 심리를 진행했는데 일단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 밖에서는 친탁신계 집권 프어타이당에 대한 해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헌법재판관들의 판결을 우려하는 ‘붉은셔츠’의 경고성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정치의 사법화’가 다소 주춤해진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잉락 수상의 프어타이당이 주도하고 있는 국가화해노선의 결과일 수 있다. 집권여당은 일부 ‘붉은셔츠’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2006년 쿠데타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왕실자문기관 추밀원의 쁘렘 의장과 직접 2006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손티 장군과의 타협을 시도해왔다. 다른 하나는 ‘붉은셔츠’의 강력한 압박을 들 수 있다. 만일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을 내렸을 경우 태국정국이 붉은셔츠로 물들고 엄청난 혼돈상태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했던 것이다. 

이처럼 태국에서의 ‘정치의 사법화’는 법치주의의 안착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현 단계 태국에서의 민주화는 ‘정치의 사법화’에 대한 도전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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