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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정보

[정치외교] 필리핀에서 폴란드로, 파리강화회에서 전개된 對美 독립청원의 외교적 포석

필리핀 국내연구자료 학술논문 서일수 역사학연구소 발간일 : 2018-12-31 등록일 : 2019-01-11 원문링크

이 글은 파리강화회가 개최된 당시의 독립청원을 둘러싼 담론의 전개과정을 다룬연구이다. 연구의 목적은 일제시기 국내외 한인들이 왜 미국을 대상으로 독립청원을하였는지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파리강화회의 당시 한국의 독립을 의제로 상정하고자 했던 움직임은 크게 북미대한인국민회, 상해 신한청년단, 국내 儒林, 연해주 대한국민회의 이렇게 네 갈래로구분할 수 있다. 이들 독립청원의 움직임은 당시 파리에 도착하여 활동하고 있었던김규식을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공식적인 대표로임명되었다. 당시 독립청원의 일반적인 논법은 우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명분으로 내세운 뒤, 지난 10년간의 식민지배가 부당하며, 일본의 야욕이 결국 국제정세에 악영향을 미칠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위임통치 또는 즉각적인 독립을 청원하였다. 독립청원의 주된 대상이었던 미국에 대해서는 그들의 이상인 ‘민주주의’에 호소하고자 했다. 이는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필리핀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1916년 존스법이 통과되면서 자치를인정받고 있었는데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위임통치 청원은 이를 의식하여 한국을 거대한 중립적 상업지대로 만들어 달라는 의미였다. 이처럼 필리핀이 위임통치 청원의모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필리핀의 상황이 미국 특유의 팽창주의가 적용되더라도 완전히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기에 너무 멀고, 불필요하게 아시아 문제에개입하는 것을 꺼려하는 먼로주의 성향 때문에 앞으로의 독립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에서 3·1운동이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독립청원은 완전한 독립 정부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투쟁노선으로 변모하였다. 3·1운동에뒤이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은 한인들이 ‘완전 독립(absolute independence)’을주장할 수 있는 계기와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윌슨의 14개조」를 적절하게 해석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호소하고자 했다. 이때 14개조 원칙이 적용되는 나라 중 독립을승인받은 경우였던 폴란드가 ‘완전 독립’의 모델로써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폴란드가 외세의 침입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자신들의 고통을 쉬지 않고세계에 호소하였던 과정이 알려진 까닭이었다.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오랜 ‘단일 민족’의 역사를 지닌 한인들이 3·1운동을 계기로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음은당시 한인들에게 미국이 「먼로독트린」에 입각하여 중남미 국가들을 승인에 준 것과같은 자격을 스스로 입증하게 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처럼 필리핀을 모델로 점진적인 독립으로 나아가던, 폴란드를 표준으로 ‘완전독립’을 승인받던 그 청원의 대상은 동일하게 미국이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전통적 대외정책인 먼로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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