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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아비 총리의 대대적인 개혁, 에티오피아의 미래와 불확실성

에티오피아 이재훈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2018/10/25

아디스아바바의 ‘봄’


다민족 연방국가인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권위주의 독재국가였다. 더욱이 한 소수민족이 정치, 경제를 비롯한 에티오피아 사회 전반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어, 에리트리아 분리 독립 사태와 같은 민족 간 무력 분쟁이 언제 또다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 지속되어 왔다. 그동안 오로미아와 암하라에서 지속되는 대규모 데모 사태 등이 인구 1억의 대국인 에티오피아를 불확실성의 시대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지난 4월, 이 모든 상황을 바꾸는 정치적 변혁이 시작되었다. 42세의 젊은 오로모(Oromo) 출신의 개혁주의자인 아비 아흐메드(Abyi Ahmed) 총리가 취임하면서 급진적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아비 총리는 취임 직후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던 국내외의 굵직한 국가 주요 현안을 열정적으로 처리하며, 그동안 에티오피아의 정치, 경제, 사회를 통제해 온 권위주의와 독재의 틀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국가로 나아가려 한다는 미래지향적 정책방향을 보여주었다.


아비 아흐메드 총리는 지난 4월 2일의 취임 이래 그야말로 어지러울 정도의 속도로 정치, 경제적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다. 반정부 인사에 대한 탄압 및 데모 군중 살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더불어 외국으로 망명한 반정부 언론 및 국민들의 귀환을 촉구하는 내용을 취임 연설에 포함하는 등 “새로운 정치의 시작”을 약속하였고, 5월에는 그동안 테러단체로 규정되어 있던 긴봇쎄밧(Ginbot 7: 5월 7일), 오로모해방전선(Oromo Liberation Front: OLF), 오가덴 민족해방전선(Ogaden National Liberation Front: ONLF) 등 반정부 단체를 테러단체 명단에서 제외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6월 30일 내각회의는 이를 공식적으로 추인 하였다. 그에 앞서 5월 26일에는 긴봇쎄밧의 지도자인 안달가츄 씨게(Andargachew Tsige) 등 수 천명의 정치범 을 석방한 바 있다. 6월 5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2개월 앞당겨 해제했으며, 7월에는 악명 높은 아디스 아바바의 메켈라위(Maekelawi) 교도소를 폐쇄하였고, 오가덴 민족해방전선의 소탕이란 미명하에 불법구금, 고문과 살해 의혹으로 점철된 소말리랜드주(州) 소재 “지지가(Jijiga) 교도소”의 인권유린 사태에 대한 조사 개시를 명령하였다.


이는 모두 에티오피아의 민족적, 정치적 화해와 국가 통합을 향한 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조치로 해석된다. 그동안 금지되었던 오로모해방전선, 오가덴민족해방 전선의 깃발, 심지어 현 집권당인 에티오피아민족 혁명 민주전선(Ethiopia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EPRDF)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는 별문장(Star Emblem)을 제거한 옛 국기가 등장하는 등 언론과 표현의 제한에 대한 완화도 뚜렷하다. “아디스 아바바의  봄”이 도래한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행보 중 하나는, 6월 18일 에티오피아의 정치구조의 기본틀인 제나위즘, 즉 다민족 연방제도를 재검토할 임무를 지닌 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는 매우 민감한 사안을 총리의 국회 브리핑이라는 무대장치를 통하여 건드린 것이다. 이는 에티오피아의 현행 헌법구조와 권력구조를 뿌리에서부터 개혁한다는 의미로 매우 민감하고 휘발성이 있는 이슈라고 할 수 있겠다.


대외적으로도 상상을 뛰어넘는 행보가 이어졌다. 7월 8일에는 에티오피아 국가지도자로는 처음으로 20년 국경전쟁의 숙적인 에리트레아의 수도 아스마라를 방문하여 다음날 “평화와 우정의 공동선언(Joint Declaration of Peace and Friendship)”에 서명함으로써 20년에 걸친 에리트레아와의 무력분쟁의 종식을 선언하였다. 두 나라는 대사관을 개설하기로 하였고, 국경 개방, 항공기 취항, 에리트레아 항만의 공동 개발 등 전향적인 조치에 합의하였으며, 7월 14일 에리트레아 대통령인 이사이아스 아페키(Isaias Afwerki)의 아디스 아바바 답방이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나라에 견주자면 최근의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일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에리트레아와의 평화협정과 화해는 에티오피아가 국경분쟁이 시작된 1998년 이전 수출입항으로 사용하던 인도양의 관문인 에리트레아의 마와사港(Port of Mawassa)의 사용을 재개할 수 있다는 중요한 경제적 함의를 갖기도 한다.


아비 총리의 거침없는 행보는 경제 정책의 개혁 움직임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 독점체제인 에티오피아 통신(Ethioa Telecom)과 에티오피아 항공(Ethiopian Airlines), 에티오피아 전력(Ethiopia Power), 해운공사 (Maritime Transport and Logistics Corporation) 등 전략기업의 일부 민영화, 그리고 철도, 설탕, 산업단지, 호텔, 기타 제조업 등 정부 소유 기업의 민영화 등 시장 자유화에 인식을 둔 개방정책을 공표하였다. 이는 에티오피아 정부가 정책 입안자이면서 동시에 산업의 주인으로서 직접 해당 산업을 이끌어 나가던 주도적 역할에서 벗어나, 정책을 입안하고 시장을 감독하는 정책입안자 및 관리자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비마니아(Abiy-mania)의 출현


아비 총리의 대중적 인기는 7월 28일과 29일의 워싱턴(Washington D.C.)과 로스앤젤레스, 30일의 미니애폴리스 등 약 25만 명의 에티오피아 이민자들이 밀집한 미국의 세 도시에서 에티오피아 이민사회를 대상으로 한 집회를 가짐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특히 20,000명 이상이 운집한 워싱턴 집회에서는 에티오피아 정교와 무슬림의 화해를 호소하며 종교적, 민족적 단면으로 갈라진 에티오피아의 통합을 강력히 추진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아비 총리는 본국과 미국의 에티오피아 이민사회를 연결하여,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에 망명하여 있는 에티오피아의 고급 두뇌들의 본국 귀환을 촉구하는데도 미국 방문의 목적을 두었다. 이는 워싱턴 집회 직전, 미국에서 활동 중인 에티오피아 출신의 학자 및 학계 종사자, 과학자, 금융전문가 등을 만나 이들이 에티오피아로 조속히 돌아와 에티오피아의 지속 가능 성장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달라고 호소한 데서도 나타난다. 대부분 내전과 정치적 탄압 때문에 미국에 정착하게 된 에티오피아 교민들은 아비 총리의 메시지에 열정적인 환호로 응답하며 새로운 에티오피아에 대한 희망과 자긍심을 가진 것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아비 총리의 개혁과 변혁을 향한 파격적인 행보는 정치집단이나, 이념보다 개인의 카리스마를 우선하는 에티오피아의 문화적 속성과 맞물려 “아비마니아(Abiy-mania)”라는 종교적인 숭배에 가까운 열광적인 지지층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비 총리는 이와 같은 에티오피아의 문화적 속성을 잘 파악하고 관리하며 새로운 총리로서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티오피아의 미래와 불확실성


아비 총리는 오로모족 무슬림 아버지와 에티오피아 정교를 따르던 암하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로모족 출신이며 그 자신이 개종한 개신교도(Protestant)이다. 따라서 민족 간의 화해와 종교적인 하모니, 그리고 정파 간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화해 중재자”일 수 있다. 그러나 아비 총리가 탄압받던 재야 출신의 지도자는 아니며, 집권당 내에서 “선택”된 인물이라는 점이 아비 총리가 아비마니아의 열광적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연결된다.


아비 총리의 정치적 연륜은 그리 길지 않다. 2008년에서 2010년까지 그가 만든 정보네트워크보안청(Information Network Security Agency: INSA)의 청장 대리였으며 에티오 텔레콤과 같은 국영회사의 이사를 지냈다. 2105년에서 2016년까지 약 1년 동안은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10년에 집권 에티오피아민족 혁명민주전선(Ethiopia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EPRDF)을 구성하는 4개의 민족 기반 정치동맹 중 하나인 오로모 민주당(Oromo Democratic Party: ODP)의 티켓으로 오로미아 짐마 지역의 아가로 지역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5년에는 곰마를 지역구로 하여 국회의원에 재선되며 오로모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2018년에는 결국 집권 EPRDF 상임위원회에 위원으로 입성하였다. 국회의원 시절 짐마 지역에서 발생한 기독교와 무슬림 충돌 사태를 원만히 수습한 정치적 수완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아비 총리를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르게 한 사건은 에티오피아를 혼란과 유혈사태로 몰아넣은 “아디스 아바바 마스터 플랜(Addis Ababa Master Plan) 사태”이다. 아비 총리는 불법적인 오로미아의 토지 몰수를 강력히 반대하며 언론의 중심에 섰다.


이를 보면 아비 총리의 정치적 배경은 오로미아라는 지역적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다. 결국 중국공산당을 모델로 만들었다는 EPRDF의 막후 실세인 정치국 (Politburo)의 동의 없이, 아비 총리가 순전히 오로모 민주당과 암하라 민주당의 지지만으로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몇몇 정치국 원로들의 공식적인 지지는 분명하였지만 아비 총리의 당대표 선출이란 시나리오를 정치국이 만장일치로 동의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정치국과 당 내부에서도 반대파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지난 6월 28일 아디스아바바 중심의 메르켈 광장에서 수류탄 투척을 통한 아비 총리 암살 시도는 그에 대한 내부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떻게 암살자들이 총리와 주요 국가지도자가 모인 단상에 접근할 수가 있었을까? 목격자들은 수류탄을 투척한 암살 시도 가담자들이 경찰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였으며, 이들이 경찰차에 탑승하여 움직였기에 수백만이 운집한 집회 장소에서 단상에서 가까운 장소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정황도 보고되고 있다. 드라마와 같은 암살 시도에 연루된 가담자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보안기관의 대(對)테러 책임자가 이 사건의 연루 혐의로 체포되는 아이러니컬한 일이 발생하였다. 30여 명 이상의 연루자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아비 총리의 암살 계획을 기획하고 조종한 배후에 대한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이 의문투성이의 암살 시도에 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 아비 총리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비 총리는 십대에 소수의 오로모 민주당의 전사로서 멩기스투 공산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무장투쟁에 합류한 이래 대부분의 군 경력을 정보 분야에서 쌓았다. 그가 유엔평화유지군 소속으로 르완다에 파견되었을 때나 에리트레아와의 국경전쟁 당시도 소수의 정보팀을 이끌었을 뿐이다. 따라서 아비 총리가 중령으로 전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에티오피아 군과의 연결고리가 취약할 수도 있다고 짐작된다.


지난 10월 10일에는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과 저격용 총 등으로 무장한 이백여 명의 특공대가 총리 관저(National Palace) 일원의 접근도로를 봉쇄하고 총리 관저로 진입하여, 봉급 인상과 수당 지급에 관하여 아비 총리와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아비 총리가 관저에 진입한 군인들과 함께 “팔굽혀 펴기 기합”을 수행하며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였으나, 이 사건은 아비 총리가 과연 군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경무장이던 중무장이든 간에 어떻게 무장한 일단의 병력이 국가 최고 보안시설의 하나인 총리 관저에 집결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 병력의 움직임을 통제하여야 할 지휘관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이와 같이 쿠데타에 준하는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여야 할 군 보안 담당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0월 15일 에티오피아 군 참모총장인 시레 멕코넨 장군은 이 군인들의 행동이 헌법과 군령을 위반한 불법행위임이 분명하며, 주동자를 체포하여 조사 중에 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전혀 우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일단의 군이나 군정보기관이 군 통수권자인 총리에게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다는 충격적인 반증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조직적인 반란이 군내부에서 기획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급진적인 개방으로 인한 종족 간의 충돌과 유혈사태는 아비 총리와 에티오피아의 앞날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난 9월 15일 일단의 오로모족 청년들이 아디스아바바 북서쪽의 부라유 지역에서 비(非)오로모계 소수민족의 집과 가게를 습격하여 살인,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는 등 아비스 아바바 일원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약 65명 이상이 사망 하였다고 보고된 이 사건은 아비 총리가 추진하는 민족 간 화해와 통합, 그리고 민주주의의 확대에 호응하여 에티오피아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킬만한 시민사회의 성숙한 역량이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낳고 있다.


민주주의는 도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정착(Consolidation) 하였는지가 중요하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구조조정기(Structural Adjustment, 1980~1999)를 거치며 민주주의를 도입하였 으나,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다. 20여 년 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 르완다의 폴 카가메를 아프리카의 민주주의 시대를 영도할 차세대 지도자라고 칭송하였으나, 그들은 결국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이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야심이 크게 작용하였음에 다툼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충돌과 반목으로 통합을 이루지 못하는 시민사회의 낮은 역량도 이들의 독재체제에 중요한 구실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에티오피아의 지역 간 균열이 지속되고 여러 종교와 민족 간의 대립이 국가의 위기로 치닫는다면 과연 그는 다른 아프리카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독재 정치로의 회귀를 모색하지 않을 것인가? 물론 아비 총리는 헌법을 개정하여 총리의 임기와 연임 등을 헌법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미 천명한 바 있기는 하다.


에티오피아의 미래의 가장 큰 불확실성은 무엇보다도 정치개혁의 바람으로 들뜬 분위기가 지나간 이후, 어려운 경제 현실을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의 문제일 것이다. 에티오피아 경제는 거의 60%의 국민총생산(GDP)에 맞먹는 높은 국가부채와 한 달 정도의 수입액을 충당할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외환보유고 등 고수위의 위험이 감지되고 있다. 만일 에티오피아의 경제가 급격히 침몰한다면 아비 총리에 대한 불만 역시 열광적인 기대 이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아비 총리가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nited Arab Emirates: UAE)을 전격 방문하여 UAE로부터 30억 불에 달하는 원조와 투자 약속을 받아내고 우선 10억 불의 원조를 에티오피아 중앙은행에 긴급 수혈하여 당장의 위기에서는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처방일 뿐, 외환부족 사태는 앞으로 10년에서 20년 정도 에티오피아 경제를 괴롭힐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더구나 에티오피아 대한 가장 큰 투자자인 중국이 에티오피아의 차관 상환 능력에 대한 의문과 함께 에티오피아에 대한 투자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공공연히 언급하고 있으며, 중국 수출신용 보험은 에티오피아에 대한 투자 및 신용보험을 인수하는 것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어 경제적 불확실성 을 증폭시키고 있다. 2006년 이래 130억 불 이상을 투자한 중국투자의 축소가 에티오피아의 경제에 커다란 충격파를 보내고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으며, 중국 일변도의 투자 정책에서 빗어나 투자유치 다변화 정책으로의 궤도 수정도 매우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2016년에 유럽투자은행이 에티오피아에 5억 불의 투자를 약속하였으나 투자의 전제조건이 개혁과 개방이었음을 감안해 보면, 아비 총리의 부상과 이에 따른 정치적 개혁, 경제적 개방은 결국 에티오피아의 급박한 현실의 타개책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비 총리는 차가운 국제정치 경제의 현실에서 에티오피아를 이끌고, 민족 간, 종교 간의 균열을 봉합하며 민주주의와 개방 정책을 진전시키고 궁극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지속성장의 길로 인도하여야 할 지난한 과제를 안고 있다. 아비 총리의 부상이 급박한 국내외의 정치 경제의 변화에 따른 EPRDF의 전략적 시나리오의 결과든 아니든 간에 그는 우리나라의 혈맹인 에티오피아의 정치적 발전의 산물이며, 현시점에서는 에티오피아의 위기 상황을 다스릴 최적의 대안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가 에티오피아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에티오피아를 민주주의의 정착과 지속성장의 길로 인도하여 에티오피아는 물론 아프리카 전체를 아울러 훌륭한 지도자의 모델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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