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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사나나 구스마오: “복수보다 화해” 외친 건국의 영웅

인도네시아 서명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마인어과 강사 2012/11/14

“한국인이라면 우리의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중학교 역사교사로 일하는 도밍구스는 이렇게 감격을 전했다. “무려 400년이예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가. 그리고 잔인했던 25년의 인도네시아 무력통치가 드디어 끝이 났어요.” 한국이 월드컵의 열기로 휩싸여간 2002년 4월, 동남아시아의 신생국 동티모르는 그들의 미래를 짊어질 지도자로 독립투쟁의 영웅 사나나 구스마오를 무려 83%의 뜨거운 지지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구스마오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건 그의 전설적인 게릴라 투쟁만큼이나 담대한 동티모르 미래에 대한 신념이었다. 그는 식민지생활에 고통 받았던 국민들에게 놀랍게도 “복수보다 화해”를 호소했다.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출한 것에 고무된 동티모르인들 사이에서 도밍구스는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우리를 식민 지배한 인도네시아를 용서하자는 거예요. 과거보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거죠.”

1974년 4월, 젊은 마르크스주의 장교들이 무혈 쿠데타를 성공시킨 포르투갈은 대부분의 식민지에 독립을 허용했다. 카네이션 혁명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광대한 포르투갈제국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동티모르에 독립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 포르투갈의 관심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같은 아프리카 식민지에 집중되었던 반면 동티모르는 갑작스런 독립의 기회를 활용할 국력이나 외교력이 충분치 않았다. 실제로 혁명 이후 아프리카의 식민지 총독들은 곧바로 친 쿠데타 세력으로 바뀌었지만 정작 공개적으로 혁명정신을 비판한 동티모르 총독은 이후 몇 달 동안이나 재임될 정도로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관심 밖이었다. 1946년생인 구스마오는 당시 학교에서 일하다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좌파성향의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에 가입하였다. 이 조직은 엄밀한 의미에서 마르크스 이념에 기반했다기보다는 교육 및 토지개혁을 통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돕기 위한 사회개혁운동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1975년 4월 베트남 공산화로 민감해진 반공주의 국가들은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불편해 했고, 결국 같은 해 12월, 미국의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자카르타에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치고 떠난 직후 인도네시아군은 동티모르 국경을 넘어 무력 침공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등의 지지 혹은 묵인 하에 동티모르를 병합한 인도네시아는 이후 25년간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입해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화(化) 하려 했지만 오히려 다수의 희생자가 나오며 동티모르 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종교적 정체성이다. 현재 동티모르는 인구의 95% 이상이 천주교신자로 동남아시아에서 필리핀과 더불어 천주교 절대 다수의 국가이다. 그러나 이 두 국가가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을 갖게 되기까지 상당히 다른 과정을 거쳤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은 오랜 스페인 식민시기를 거치며 천주교가 현지사람들에게 서서히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된 반면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가 침공한 1975년까지도 전 인구에서 천주교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30%를 채 넘지 않았다. 천주교인 다수 국가인 포르투갈이 오랜 시간 지배했음에도 천주교는 동티모르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더 정확하게는 포르투갈 식민정부는 선교의 의지자체가 미약했다. 오히려 인도네시아에 병합된 1975년 이후 동티모르 인구의 종교분포가 급격히 달라지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모든 국민은 반드시 하나의 종교를 가져야만 한다는 국내 법률을 동티모르 인들에게도 적용하면서부터이다. 이제 새롭게 인도네시아인으로 불리게 된 동티모르 인들은 정부가 제시한 공인종교 5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그들의 눈에는 식민지배자의 종교인 이슬람을 뒤로한 채 대다수가 천주교를 선택하였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천주교는 동티모르 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또 인도네시아 식민시기 동안 민중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기간 구스마오는 동티모르 민족 해방군(Falintil)의 수장이 되어 기나긴 게릴라 전을 이끌게 되었다. 약 17년간의 투쟁 후 1992년 11월,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된 그는 반란선동 등의 혐의로 자카르타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그에게 감옥생활은 오히려 자신의 진보적 민족주의 사상을 더욱 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무장투쟁의 지도자였음에도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지속적으로 비폭력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또한 그는 식민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정치적 산물이며 인도네시아의 일반국민은 동티모르의 친구가 되어야지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1999년 8월 30일, 유엔 주재 하에 동티모르는 독립투표를 실시하고 그 해 9월 신생국 동티모르에서 가장 강력한 초대대통령후보가 된 구스마오는 7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다.

2000년 이후 광주 인권상, 시드니 평화상등 다양한 인권-평화상을 수상한 구스마오는 국민의 기대와는 다르게 자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시인이나 사진작가로 살아가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를 2002년부터 대통령으로 또 총리로 동티모르 정치의 중심에 서 있게 하고, 이제는 전제정치와 독재정치 사이에 서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신생국가의 독립영웅이 독립 후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 힘들다는 구스마오 스스로의 예상이 맞아가는 걸 지켜보는 것은 우울하다.

독립의 환호로 들끓던 딜리는 2006년 여름 최악의 유혈사태를 맞이하였다. 전직 군인들의 시위에 정치에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가세하면서 최소 50명이 사망하고 1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폭력사태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집을 떠난 도밍구스로부터도 비통한 소식이 왔다. 그의 가족 중 한 명이 화살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우며, 더욱 놀라운 건 화살을 쏜 사람도 평소 마주치던 마을 젊은이였다며 그는 절규했다. “식민지시대보다 더 힘들다. 그 때는 우리의 적이 인도네시아였지만 지금은 적도 친구도 모두 동티모르 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힘들다”고. 평화를 함께 하는 것이 고난을 함께 하는 것만큼이나 가시밭길임을 동남아시아의 가장 젊은 나라는 고통스럽게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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