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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정보

[역사]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경제공동체의 형성과 발전과정의 재조명

우즈베키스탄 국내연구자료 학술논문 황영삼 역사문화연구 발간일 : 2007-02-28 등록일 : 2017-11-24 원문링크

본고의 목적은 현재 황폐화한 우즈베키스탄 콜호즈 체제의 실상을 보며 과거 우즈베키스탄 농업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고려인 콜호즈 경제공동체 활동을 <북극성> 콜호즈를 중심으로 재조명해 봄으로써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형성된 고려인 콜호즈의 경제적 실상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데 있다. 1920년대 말부터 소련전역에서 실시된 농업집단화 정책으로 고려인들은 콜호즈와 솝호즈를 중심으로 한 집단공동체적 조직 속에 편입되었고, 극동에서 조직된 <북극성> 콜호즈 또한 고려인 경제공동체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스탈린의 강제이주 지시로 <북극성> 콜호즈는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주에서 재결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북극성> 콜호즈 소속의 고려인들은 기타 다른 콜호즈의 고려인들과 함께 특유의 근면성으로 새로운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이루어 나갔다. 특히 <북극성> 콜호즈는 김병화 회장이 지도한 이후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마침내 우즈베키스탄과 나아가 소련전역에 걸쳐 가장 모범적인 콜호즈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북극성> 콜호즈의 성공적인 업적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실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북극성> 콜호즈는 초기에 벼재배에 주력하였으나 1940년대 중반 이후에는 벼대신 면화재배에 집중하면서 성공적인 수확을 기록하였는데 면화는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적인 주력작물이었다. 둘째 농업에 관한 제도와 지원정책이 최대한 잘 활용되었다. 과거 기계-트랙터 센터가 관리하던 대량의 농업기계들이 콜호즈로 이관되면서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변화를 매우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셋째 콜호즈 회장인 김병화의 우수한 인격과 합리적인 콜호즈 경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과 김병화 회장은 1974년에 사망할 때까지 콜호즈 회장으로 재직할 수 있었다. 넷째 <북극성> 콜호즈 내부에는 김병화 회장외에도 성실한 농민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한 콜호즈에서 26명이나 되는 사회주의 노력영웅을 배출했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이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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