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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오피니언

[전문가오피니언] 우크라이나 사태의 역사적 맥락 짚어 보기

우크라이나 구자정 대전대학교 H-LAC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2022/03/11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양국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서 시작
요새 우크라이나 사태가 화두다. 현재 러시아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그간 위협과 국지적 분쟁으로 그쳐왔던 우크라이나 사태는 자칫 서방권과의 전면전으로 비화하여 혹자에 따르면 제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도 있는 크나큰 위기로 발전하는 듯이 보인다.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가?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 문제에 이렇게 집착하는가? 현재 해외의 많은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행보를 제국 러시아를 부활시키고 러시아의 패권을 확립하려는 독재자 푸틴의 야망에서 찾는 것처럼 보인다. 일견 일리 있어 보이는 이러한 설명은, 현재의 러시아에게 과연 그럴 만한 국가적 능력이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범세계적 유토피아를 추구하던 사회주의 보편국가 소련과 현 러시아를 동일시하는 치명적인 인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1), 러시아의 행위와 의도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분석은 소련 해체 이후 30여 년간의 단기적인 지정학적 현실에만 주목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존재해 온 수백 년간의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러시아가 왜 이렇게 전면적으로 우크라이나에 개입하는가를 며칠 전 사실상 매우 정확하고 명료하며 단호하게 표명한 푸틴의 대국민 연설에 대한 서방권 국가 정부들과 서구 언론의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유수 언론은 물론이고 뉴욕 타임즈와 르몽드 및 가디언과 같은 소위 진보적인 언론조차도,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국가가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순전히 소련의 창조물”이라는 푸틴의 연설 내용을 단순히 광기와 궤변으로 치부하며 이 연설 속 함의와 그 이면의 역사적 맥락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러시아의 도발을 규탄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력을 통해 우크라이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러시아의 행태는 명백한 도발이며 이를 억제하고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한 국제적 차원의 제재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제재를 부과하기에 앞서 러시아가 왜 저렇게까지 나오는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행동에 나서야 하는데, 해외 언론에서 확인되는 작금의 상황은 이 지역 전공자로서 상당히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실 미국을 포함하여 서방권 국가들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매우 광범위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역사 전문가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서방권 언론의 분석에는 놀랍게도 그들의 목소리와 의견이 거의 들리지 않기 때문이며,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미력하나마 바로 해당 지역의 민족문제를 전공하는 역사학계의 목소리를 전달해 보고자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통합적 정체성
먼저 확실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가입,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장기적으로 서방권으로 편입되는 상황을 러시아는 어떤 경우라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사안은 푸틴 체제의 불법성과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장기집권을 이어오며 자국민에 대한 폭력을 서슴지 않아 온 푸틴 정권의 폭압성과는 별개로, 푸틴의 대(對)우크라이나 정책은 특이하게도 그동안 러시아 국민 대다수에게 정파를 막론하고 큰 지지를 받아왔는데(물론 전쟁과 그에 따른 부담까지 향후 지지할 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지만), 러시아가 보여주는 일견 무모하리 만큼 완고한 입장과 폭력적인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특수성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존재해 온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에는 역사적으로 [근대적 국민] 국가가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현 우크라이나는 순전히 소련의 창조물”이라는 푸틴의 성명은 - 명백히 역사적 배경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겠지만 - 그 내용 자체는 정확히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사실 현 우크라이나의 국가 정체성, 국경, 경제기반 등등이 모두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특히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이른바 ‘토착화 정책(Korenizatssiia)’ 중에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은 소련의 민족문제에 천착해 온 세계학계의 중론이라 할 수 있다2). 우크라이나의 현 영토 또한 소련에 의해 완성되었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인 못지않게 다수의 폴란드인들(과 유태인)이 거주해 온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은 1945년 이후에야 처음으로 우크라이나라고 하는 단위체 소속으로 편입되었으며, 우크라이나 만큼이나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가졌던 폴란드에게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동부 영토(특히 동프로이센) 대부분이 그 댓가로 할양되었다. 오늘날 러시아가 빼앗은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된 것 역시 이 지역을 러시아에서 떼어낸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쉬쵸프의 인위적 행정구역 개편(1954)에 의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애초 크림반도는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속한 적이 없었다.   

국가가 없었다고 하면 민족은 어떨까? 물론 우크라이나인으로 불리게 될 집단은 역사 속에서 물리적으로 실재하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규정하는 민족정체성의 문제로 가게 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인 대다수가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자처하는 의식 자체가 20세기 초반에야 나타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었으며, 이 정체성을 주입하고 보급한 주역이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와 언어에서 우크라이나 사회의 전면적 ‘우크라이나화’를 반강제적으로 추진했던 1920년대와 30년대 소련의 모순적인 민족정책이었기 때문이다3). 사실, 원래 동슬라브어에서 ‘변경’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였던 ‘우크라이나’라는 단어 자체가 완전히 고유명사화하여 이 지역을 지칭하는 단어로 등장한 것 또한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었다. 그 이전까지 우크라이나인들이 스스로를 자칭하며 정체성을 규정하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따로 존재하였으니, 바로 ‘소러시아인’이 그것이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소러시아’라는 단어는 ‘대러시아’에 대비되는 비하적인 명칭으로 간주되지만, 원래 대러시아와 소러시아라는 단어의 어원 속에는 그런 의미가 없었다. 모스크바 중심의 대러시아와 키예프 중심의 소러시아를 구분하는 관행은 14세기 동로마 제국 시대 동슬라브인을 대상으로 한 정교회 교구 구분으로 시작된 전통으로, 이 관행은 그리스 본토(소그리스)와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섬의 변경(대그리스)을 구분하던 고대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유래한 것이었다. 시라쿠사의 ‘대그리스인’과 본토 그리스 아테네의 ‘소그리스인’이 모두 같은 그리스인이듯, 작은 러시아인과 큰 러시아인들 (그리고 하얀 러시아인들 또한) 모두 같은 러시아인, 또는 동슬라브어로 같은 ‘루시인’이었던 것이다4).

그렇다. 우크라이나인들도 모두 원래는 ‘루시인’들이었으며, 심지어 19세기 초 우크라이나 민족정체성을 처음으로 태동시킨 효시로 자타가 공인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경전 또한 자신들이 루시인이며 자신들이 거주하는 땅은 ‘소러시아’임을 자처한 바 있으니, 이 경전의 제목은 다름 아닌 ‘루시인의 역사(Istoriia Rusov)’였다5). 19세기 초반 익명의 저자에 의해 집필된 이 경전은 근세 시기 이 지역에서 활동한 자포로지예 카자크 헤트만들의 영웅담을 다루는 저작으로, 이 카자크들이 세운 국가(헤트만국가) 역시 자신들의 나라를 ‘루시인의 나라’로 규정했으니6), 페레야슬라브 협정을 통해 자치권을 가진 제정 러시아의 일원, ‘소러시아’는 바로 이 카자크 국가로부터 유래하였다. 심지어 이들 ‘소러시아’ 출신 엘리트들은 표트르 대제와 에카체리나 여제 시기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동방정교 보편국가를 추구하는 ‘보편제국’ 제정 러시아를 건설한 주역이었으니, 그들의 협력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7). 제정 러시아는 모스크바 중심의 대러시아인만의 국가가 아니었다. 제정 러시아는 모스크바만의 대러시아를 대표하는 국가가 아니라 ‘작은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하얀 러시아(벨라루스)’를 함께 대표하는 나라임을 공식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그리고 대러시아인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신민인 같은 ‘루시인(러시아인)’이었다. ‘루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그리고 대러시아인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그 루시인의 나라가 바로 ‘로씨야’였던 것이다.

이런 통합적 정체성에 처음으로 균열이 관측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이 무렵부터 러시아 제국의 신분제에 귀족으로 편입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카자크국가의 엘리트들 사이에, 자신들과 ‘모스크바 러시아’와의 다름 및 소러시아만의 독자적인 루시 정통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종류의 움직임이 포착되기 때문이다8). 앞서 언급한 ‘루시인의 역사’를 필두로 태동하기 시작한 이 움직임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곳은 같은 ‘루시’인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 있던 우크라이나 지역이 아니라, 그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던 서부 우크라이나의 할리치나 지방이었다.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이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 지역의 소러시아인 사이에 소러시아어 교육과 문화진흥정책을 펼치며 적극적으로 루시인 정체성을 권장했는데, 이는 이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폴란드인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9). 오스트리아 당국의 후원에 따라 할리치나 지방에서는 곧 ‘루시인이지만 제정 러시아가 대표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루시인 정체성이 곧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10).

이 정체성에 ‘우크라이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이가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미하일로 흐루쉡스키(Mikhailo Hrushevski)’였다. 러시아령 우크라이나 출신이나 할리치나에서 교육받은 역사가였던 흐루쉡스키는, 인식이 언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식을 규정하는 것에 주목하며 폴란드인은 물론이고 러시아인과도 차별화되는 새로운 명칭을 모색했고, 그의 단어 선택은 바로 원래 변경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였던 ‘우크라이나’였던 것이다. 그가 서술한 대작, ‘우크라이나-루시의 역사(Istoriia Ukrainy-Rusy)11)’에서 흐루쉡스키는 그간 동슬라브 정체성의 핵심이던 키예프 루시의 역사를 제정 러시아의 역사에서 분리시켰다. 키예프 루시-카자크 헤트만 국가-현대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새로운 계보도를 통해 ‘루시인이지만 루시인의 국가 로씨야(러시아)에 속해선 아니되는’ 이 집단에 우크라이나인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체성과 역사를 부여하였다. 한마디로 흐루쉡스키는 역사의 분리를 통해 민족의 분리를 꾀한 것이다. ‘루시인의 역사’로 태동하고 ‘우크라이나-루시의 역사’를 통해 완성된 이 새로운 정체성은 20세기 초까지도 -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후원을 받는 할리치나를 제외하면 - 우크라이나 내 다른 지역에서는 폭넓게 수용되지 않았다12). 이 시점의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란 흐루쉡스키 주변의 소수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만 신봉하는 - 다소의 과장을 더하면 - 불과 수십 명의 몽상에 지나지 않았으니, 대다수의 소러시아 지식인들은 우크라이나 독립국가 수립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 정부의 전복을 통한 사회혁명에서 소러시아문제의 활로를 찾았기 때문이다. 1917년까지도 절대 다수의 우크라이나인들(특히 흑토지대의 농민들)은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역사상 최초의 우크라이나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던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반’ 흐루쉡스키의 노력을 좌절시킨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대중적 지지의 부재였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기지 않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다.

아이러니는 그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흐루쉡스키의 꿈을 실현한 주체가 바로 볼셰비키였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여기지 않던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심어주고 그들에게 국가를 만들어주며, 그들에게 표준화된 우크라이나어를 보급함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우크라이나를 창조해 낸 주역 또한 바로 소련이었다. 세계 역사학계에서 소수민족 우대제국(Affirmative-Action Empire)라는 별칭을13) 얻을 정도로 소수민족 정책에 열성으로, 바로 그 소수민족들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를 표방하며 이를 실제로 실현한 소련은, 계급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경로로써 민족해방을 추구하며 수 많은 국민국가들과 민족들을 정책적으로 탄생시켰는데, 우크라이나 역시 그 결과물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민족정책을 통해 러시아령 투르케스탄이 단일한 튀르크 민족이 아니라 우즈벡과 키르기즈, 카자흐, 투르크멘 등으로 찢어진 것처럼 범루시 정체성 역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로 찢겨 조각나버린 것이다.

푸틴의 광기에 더해 형식이 본질이 되어 나타난 비극
자.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나토가입 문제와 서방권 편입에 왜 저리 광기어린 반응을 보이며, 다수의 러시아인들이 – 푸틴에 비판적인 반체제 인사들까지 일부 포함해서 – 왜 우크라이나 문제에서는 그동안 그를 지지해왔는지,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선 왜 심지어 우크라이나인 자신들조차 적지 않은 수가 푸틴의 러시아에 동조하는 듯하게 보이는 지가 명백해 졌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푸틴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가 무엇이며 우크라이나인은 누구인가에 대해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과는 다른 종류의 견해 또는 보다 전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정체성은 다수의 러시아인 (및 벨라루스인) 역시 공유하는 범루시 정체성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의 후원 속에서 독자적인 ‘우크라이나 정체성’이 가장 일찍 (19세기 후반) 착근하였으며, 소비에트 통치 이전에 등장했던 서부 우크라이나(특히 할리치나)와는 달리, 중부와 동부 우크라이나인들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모호한데, 이는 이들의 ‘우크라이나화’는 소비에트 연방이 남긴 유산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누가 우크라이나인이고 누가 러시아인 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국가의 호명이었다14). 더불어 양자가 같은 루시인으로서 수백 년간 공유해온 종족적, 문화적, 종교적 동질감은 서로의 ‘다름’을 인위적으로 강요했던 소비에트 정권의 강제력으로도 소멸되지 않았다. 현재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은, 푸틴의 광기에 더해, 소련 시절 관공서의 공무원이 출생 시 정해주던 신분증 상 ‘형식’상의 민족정체성이 소련 해체 이후 돌연 개별 국민국가를 정의하는 ‘본질’이 되어버리면서 벌어진 참사라 할 수 있다. 

소련 시절에는 사회주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형식에 불과하였던 민족이 ‘본질’이 되어 버린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 또는 소러시아 형제들의 ‘탈루시화’를 받아들이고 우크라이나인들을 떠나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우크라이나가 꿈꾸는 탈루시화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또는 단기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사회 일각에서 꿈꾸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나아가 EU가입은 과연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인 것일까? 그동안 우크라이나인들 자신들조차 동부와 서부로 찢긴 채 이 문제에 대한 공동체 내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러한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필자의 예측은 비관적이었다. 근대 우크라이나의 문제적 정체성을 규정해 온 ‘역사의 간주(List der Geschichte)’가 만든 모순의 무게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간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침공이 외려 친러와 반러로 찢겨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을 단결시키고 있는 현 상황은, 민족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오히려 선제적으로 민족주의를 증진하고 발전시키며 필요한 경우 민족의 ‘제조’를 서슴지 않던, 소련 시절 토착화 정책의 모순이 다시 재현된 것과 같은 역설적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 사태의 역사적 근원인 현대 우크라이나의 취약한 민족 및 국가정체성은 이 국가가 전적으로 소비에트 정권의 완전한 피조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이는 푸틴이 불법적인 러시아군의 침공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논거이기도 하다.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크라이나 ‘국가’ 창조라는 흐루쉡스키의 꿈을 실현해 완수한 이가 바로 레닌과 스탈린의 소련이었다면, 동과 서로 찢겨온 우크라이나인들을 통합시켜 ‘민족’ 창조라는 흐루쉡스키의 또 다른 몽상을 진정으로 실현시키는 주역이 바로 푸틴의 러시아가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정복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의 침공이 그가 막고 억제하려던 현상을 조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첫 탄생’이라는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각주
1) 소련의 진정한 힘은 핵무기와 거대한 군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소련 체제가 추구하고 표상하던 유토피아적 가치에 있었다. 예컨대 냉전기 영국에서 활약한 캠브릿지 5인조(영국인)라든가 이차세계대전기 일본에서 활약한 리하르트 조르게(독일인)와 같은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충성을 바친 대상은 러시아가 아니라 소련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인만의 국가가 아니라 전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조국”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푸틴의 러시아가 레닌과 스탈린의 소련이 결코 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2) Yuri Slezkine, The USSR as a Communal Apartment, or How a Socialist State Promoted Ethnic Particularism, Slavic Review, 53-2, 1994, pp. 414-452; Francine Hirsch, Empire of Nations: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05
3) 물론 이는 우크라이나만의 상황은 아니라 소련 전역에서 수행된 정책이었다.
4) A. V. Solov’ev, “Velikaia, Malaia i Belaia Rus’,” Voprosy istorii, No. 7, 1947, pp. 30-32;  Wilfrid Simpson, “The Names ‘Rus,’ ‘Russia,’ ‘Ukraine’ and Their Historical Background,” Slavistica, No. 10, 1951, p. 13 
5) Georgii Konisskii, ed., Istoriia Rusov ili Maloi Rossii (Moscow: Universitetskaia tipografiia, 1846)
6) 이 카자크 국가의 지도자였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자처한 호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서쪽 변경 지역에 거주하는) “루시인의 유일한 전제군주”였다.
7) 구자정, 「“변경”에서 “우크라이나”로-『루시인의 역사』를 통해 본 우크라이나 민족서사의 첫 탄생-」. 『 슬라브학보 』, 35-3, p. 7
8) Dmitri Miller, “Ocherki iz istorii iiuridicheskogo byta staroi Malorossii - Prevrashchenie malorusskoi starshiny v dvorrianstvo,” Kievskaia Starina, No. 1, 1897, p. 18
9) 19세기만 해도 할리치나의 주도 리비우시는 사실상 폴란드인의 도시였고 1945년까지 리비우시 인구의 절반은 폴란드인으로 우크라이나인보다 많았다.
10) Andriy Zayarnyuk, “Obtaining History: The Case of Ukrainians in Habsburg Galicia, 1848–1900,” Austrian History Yearbook, 36, 2005, pp. 121 – 147
11) Mikhailo Hrushevskii, lstoriia Ukraini-Rusi. 10 Vols. L’vov-Vienna-Kiev, 1898-1936; reprints: New York, 1954-58; Kiev, 1991-94.
12) 동부와 중부 우크라이나의 경우 ‘우크라이나’라는 호칭이 우크라이나인 사이에 자리잡는 것부터가 소비에트 시기이다.
13) Terry Martin, The Affirmative Action Empire: Nations and Nationalism in the Soviet Union, 1923-1939 (Ithaca: Cornell Univ. Press, 2001).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복잡성은 짧은 지면으로 설명하기에 어렵다. 혹자는 1930년대의 소위 “대기근(홀로도모르)”를 우크라이나에 대한 탄압으로 여기지만, 스탈린 체제의 폭압성은 우크라이나만을 겨냥하지 않았다. 대기근은 우크라이나만 한정된 사안이 아니라 러시아 본토를 포함하여 농업 생산이 집중된 연방 내 “모든” 지역을 포괄했기 때문이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 인구의 2/5가 (또는 다른 추산에 의하면 무려 절반이) 굶주림으로 사망한 카자흐인이 우크라이나인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가장 큰 피해자이며, 절대 수치로 따지면 스탈린식 근대화에 의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민족 집단은 바로 “러시아인”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인” 대기근 피해자의 수는 현재까지도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 너무도 광범위한 지역에 일어났으며 그 수 역시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14) 세계 역사학계에서 이를 부르는 명칭이 “여권 민족주의(Passport National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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